(아침에 뜬 선명한 무지개.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았습니다.)
제가 묵고 있는 Sakura Tower에는 한국, 일본, 싱가폴, 필리핀, 인도네시아, 포루투갈, 영국, 러시아의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현재 근무중인 Becora Station을 비롯한 UNPOL 근무지에는 한국, 스웨덴, 필리핀, 호주, 뉴질랜드, 말레이시아, 스리랑카, 감비아, 우간다, 세네갈, 방글라데시, 네팔, 루마니아, 중국, 캐나다 등 수십개국에서 파견된 사람들이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가장 필요한 것은 ‘공통된 방식’, ‘Global way’를 찾는 것이며, 이중 가장 쉽고 효과적인 것은 ‘미소’입니다. 이곳에서 2달 가까이 체류하면서 느낀 것 중 하나가 ‘한국인과 일본인들은 웃는 것에 서툴다’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제가 아이키도를 하길 잘했다고 느끼게 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아이키도는 ‘커뮤니케이션의 무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Sakura Tower에 새로 입주하게 된 JIKA 소속 여성과 우연히 마주쳤을 때 이런 말을 해주었습니다. ‘굳이 무기를 휴대하거나 사람들을 두려워하진 마세요. 그저 거리를 걸을 때 눈이 마주치면 먼저 웃으며 인사하세요. 당신이 그들의 적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세요. 그것만으로도 당신이 위험에 처할 확률은 현저히 줄어듭니다.’ 너무나 간단하지만, 너무도 효율적인 자기호신술이자, 쉽게 장벽을 허물며 친구를 사귀는 방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많은 한국인과 일본인들이 잘 하지 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한국인과 일본인의 무표정하거나 화난 듯한 표정 및 공격적으로까지 들리는 억양, 인사를 하더라도 그냥 지나쳐버리거나 멀뚱히 바라보는 행동에 저 또한 깜짝 놀라거나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을 때가 적지 않습니다.
동티모르의 수도 Dili는 작은 도시로, 소문이 빠르게 퍼지는 곳입니다. 제가 사는 Audian street의 사람들은 모두 제가 한국에서 온 경찰관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곳에 오자마자 알게된 싱가폴 여성 Diana의 조언을 따라 택시를 이용하지 않고 1시간여 거리를 일부러 걸어다니며 사람들에게 눈인사를 하고 돌아다녔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덕분에 피부가 새카맣게 타서 동남아인을 능가하는 수준의 피부색을 갖게 되었습니다만.) 어제 제가 필리핀인이 운영하는 미용실에 머리를 깎으러 갔을 때도, 그는 이미 저를 알고 있었습니다. 제 이름을 말하자, ‘아, 당신이 그 한국에서 온 잘 웃는다는 경찰관이군요. 정말 웃으니 눈이 안보이네요.’라고 하더군요.
거꾸로 이곳의 외국인 친구들에게서 ‘왜 다른 한국인(또는 일본인)들은 얼굴표정이 무섭고 잘 웃지 않느냐’, ‘왜 일본인들을 미워하면서 막상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건 엇비슷하냐’, ‘무엇 때문에 서로 알게 되면 꼭 나이를 물어보면서 서열을 따지려 드느냐’, ‘(한국인과 일본인은) 같은 아시아인이면서 우리들에게 어떤 우월감을 느끼는 듯 하다’는 등의 당혹스러운 얘기를 듣는 일도 많습니다. 일례로, Sakura Tower에 거주하는 한 한국인이 ‘왜 이름이 일본어인 Sakura냐, 바꿔라’거나, 또 다른 사람은 저도 자주 가는 근처 중국인 식당에 가서 먹어보지도 않은 채 ‘당신네 식당은 맛이 없다’며 음식에 손도 대지 않고 물려버리는 무례한 행동을 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또한 제가 직접 경험한 일로 그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을 때 한 일본인이 음식이 늦게 나오자 점원의 등에 대고 일본어로 ‘바카야로(바보)’라고 작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말은 통하지 않더라도 마음은 전해지는 법입니다.
UN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영어입니다만, 그것이 미국이나 영국인, 호주나 뉴질랜드인이 사용하는 영어 그대로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함께 근무하는 호주나 뉴질랜드인들이 그들이 자국에서 사용하는 방식 그대로 말하면 저를 비롯한 타국인들은 거의 못 알아듣습니다. 영화보다 뉴스가 알아듣기 쉽고, 우리가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또박또박 말해주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가 이곳에서 사용하고 사용해야 하는 영어는 속어가 섞여있지 않은 Plain English, Global English입니다.
또한 액센트에 있어서도 신경을 써야 하는데, 자국어의 액센트를 그대로 영어에 실어 쓰면 낭패를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경상도 사투리나 필리핀 특정지역의 억양을 그대로 쓰면 마치 화가 났다거나 명령을 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물론 처음 한 두 번이야 이해해줄 수 있지만, 문제점을 지적하고 조언해주었음에도 이를 고집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누구도 더 이상 그에게 가까이 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어느 나라에서나 마찬가지지만, 서로 자신을 완벽히 표현할 수 없는 제2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모여 일하는 곳에서는 더욱 큰 문제가 됩니다. 화난 듯한 억양에다 미소를 띄는 것마저 어색해하는 사람을 상상해보시길 바랍니다. 저는 이곳에 와서 고바야시 선생과 홈마 선생께서 ‘무술가이기 때문에 웃어야 한다.’고 말씀해주신 것, 아이키도를 하면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연습’을 한 것을 참으로 다행스럽게 여겼습니다.
어젯밤 Becora station 관할의 마을에서 한 살 박이 아기가 죽었다는 신고가 Suco(마을 족장)에게서 들어왔습니다. 아기가 죽었다는 집으로 가보니 마을 사람 모두가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고, 이미 아기의 머리맡에는 십자가가 놓여있었습니다. (동티모르의 주된 종교는 카톨릭입니다.) 저는 비록 종교가 없지만, 아기의 명복을 빌며 합장을 했습니다. 아기의 죽음의 원인을 물으니, ‘주술사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가족의 말. 아기가 며칠 전부터 아팠는데, 병원에 가도 차도가 없어 건너 집에 사는 주술사에게 치료를 부탁했는데, 그가 주술을 부린 직후에 아기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집 거실(이라고 보이는 구획)에 물잔과 비닐봉지가 있고, 비닐봉지 안에는 머리카락, 동물의 뼛조각 등이 주술에 사용될 법한 물건들이 들어있습니다. 이 주술사는 얼마 전 마을사람들로부터 경원 당한 적이 있는데, 그때 저주를 내리겠다고 한 적이 있다고 하며, 아기가 죽자 도망친 상태였습니다.
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주술이나 불가사의의 존재를 믿는 편이지만, 경찰관의 임무는 최대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이유를 찾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현장보존을 하고, 사체를 부검해야 하지만, 동티모르인들은 부검을 망자에 대한 모독으로 여기기 때문에 이를 바라지 않습니다. 만일 그들을 설득하지 않고 부검을 실시했다간 큰 소동이 일어납니다. 가만히 있던 주민들이 순식간에 폭도로 돌변해 경찰관들이 오히려 공격 또는 습격당한 일도 부지기수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가족을 설득하면서 수사관과 감식반이 오길 기다렸습니다.
감식관의 결론은 ‘설사로 인한 탈수증세에 의한 사망’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깨끗한 물을 자주 먹여 수분을 보충하면서 병원에서 적절한 치료만 받았다면 아기는 살 수 있었습니다. 아기의 사망원인을 제공한 것은 부모이지 주술사가 아닌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설명해주어도 부모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은 이를 믿으려 하질 않고, 부검 역시 거부하면서 사건 처리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술사를 쫓아 복수를 하려 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그들을 보면서 냉소와 조소를 보내는 몇몇 사람들을 보게 되는 것 또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들은 교육이 필요하지만,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정부가 제공하지 않고 있는 것이 더 큰 문제가 아닐까요.
포루투갈은 400년간 동티모르를 지배하면서 현지인에게 아무런 교육이나 시설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25년간 동티모르를 지배한 인도네시아가 이곳에 교육과 시설을 제공했습니다. 결과적으로 400년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포루투갈어를 하는 동티모르인은 3%에 불과하며, 25년이란 상대적, 절대적으로도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인도네시아어를 하는 동티모르인은 80%에 육박합니다. 테툼과 함께 공식어로 지정된 언어는 포루투갈어이며, 법률은 인도네시아어와 영어로 되어있습니다. 동티모르의 현지 언어 16개 중 하나이자 동티모르의 공식어 중 하나로 지정된 Dili 지역언어 테툼은 어휘가 부족한 매우 초보적인 언어로, 현재 UN에서 이를 제대로 된 언어로 만드는 작업을 교육사업과 병행하고 있습니다. 저는 식민지배의 정당성이나 잘잘못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지의 상황의 비정상성, 불합리함, 그리고 이들에겐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