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2/02일자 게시물 이동)
<대동류와 다케다 소가쿠>
현존하는 일본유술 중에서, 최근 눈에 띄게 알려지게 된 것이 다이토류아이키쥬지츠(大東流合氣柔術, 이하 대동류)이다. 이는 아이키도의 국제적인 성공에 힘입은 바가 크다 할 것이다. 20세기의 벽두 4반세기, 대동류의 발전과 교수에 생애를 바친 다케다 소가쿠는 아이키도 창시자 우에시바 모리헤이에게 기술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대동류와 아이키도의 사이에 보이는 복잡하고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는, 다음에 서술할 여러가지 과거의 사실에서 태어난다.
아이키도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대동류합기유술이 무도계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80년대 중반, 아이키도 전문지 '아이키뉴스(『合氣ニュ-ス』,당시 일영대역판)'에 게재된 일련의 기사에 의한 것이다. 이들 기사는, 다케다 소가쿠의 아들 다케다 도키무네, 그리고 사가와 유키요시(佐川幸義) 및 히사 타쿠마(久琢磨), 콘도 가츠유키(近藤勝之), 모리 하카루(森恕), 이노우에 유스케(井上祐助), 오카모토 세이고(岡本正剛), 그 이외의 대동류의 저명한 사범들의 협력을 기반으로 치러진 인터뷰로부터 만들어졌다.
그때까지는 다케다 소가쿠와 대동류에 관한 약간의 정보는 주로 아이키도 관계에서 나온 것 뿐으로, 다케다 소가쿠는 다수의 폭력사건에도 휘말려있었던, 괴벽을 지닌 괴퍅한 무술의 명인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무술사(武術史)적으로 보아도, 소가쿠와 대동류는 마이너스 이미지가 강했지만, 세월이 흐르고, 또 소가쿠를 직접 아는 많은 사람들의 증언이 출판됨에 의해, 소가쿠 관(觀)이 차츰 변화하여, 현재는 일본의 가장 대표적인 무술가의 한 사람으로서 손꼽히고 있다.
<다케다 소가쿠의 생애>
다케다 소가쿠는, 오늘날은 물론 그가 살았던 시대에서 볼 때도 특이한 삶을 산 인물이라 할 수 있다. 1859년, 후쿠시마현에서 태어난 다케다 소가쿠는, 어린 시절, 자택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장소에서 벌어진 회진전쟁(會津戰爭)을 목격하였다. 작은 체격에 반항심 왕성한 소가쿠 소년은, 이 싸움의 광격에 완전히 마음을 빼았겼다. 이 생생한 유아경험이, 분명 그를 무술가로 이끈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소가쿠의 아버지`다케다 소키치는 집안에서 내려오는 농지를 이어받은 향사(鄕士)였다. 교육을 받은 인물로서, 서당에서 가르치기도 하고, 마을 스모에서는 오오제키(大關)의 지위까지 받았다. 또 검술 및 봉술을 쓸 줄도 알아, 자택 내의 도장에서 가르쳤다.
소가쿠는 소년 시절부터 여러 무술을 접하여, 스모, 호조인류 다카다파 창술(寶臟院流高田派槍術), 오노하잇토류(小野派一刀流) 검술, 그 외 해당 지역의 무술을 배웠다고 전해진다. 13세 때, 천둥벌거숭이에 장난이 지나쳐 아버지 소키치에게 서당에서 쫓겨난 소가쿠는, 시종일관 아버지에게 상경하게 해줄 것을 조른다. 지키신가케류(直心影流)의 사카키바라 켄키치의 내제자가 되기 위해서였다. 사카키바라는 당시 무술계에서 유명한 도장을 갖고, 검, 봉, 창, 나기나타, 그 외 여러가지 무기술을 가르치고 있었다. 소가쿠는 도쿄의 사카키바라 도장에서 2,3년 집중적으로 수련을 했다고 전해진다. 소가쿠가 실제로 사카키바라의 밑에서 수행하였는지의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없기 때문에, 그 사실에 의구심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으나, 소가쿠가 대단한 검술가이기도 한 점은 부정할 여지가 없다. 소가쿠가 많은 무술을 배운 것은 분명하며, 또 자주 자신의 기술을 시험하기 위해 시합이나 결투을 했다.
소가쿠의 도쿄에서의 수행은 1876년 형 소카츠의 돌연사로 중단되었다. 신관(神職)이었던 소카츠가 사망했기 때문에, 소키치는 둘째 아들 소가쿠에게 그 뒤를 잇게 하여, 세상에 신망이 있는 이 직업을 갖도록 하려 했다. 그리하여 17세의 소가쿠 청년은 후쿠시마현 츠츠코와겐 신사(都都古別神社)에 가게 되었다.
궁사(宮司)인 호시노 치카노리(保科近悳)는, 예전에는 사이고 다노모(西鄕賴母)라는 이름으로 회진번(會津番)의 가신으로 일한 적도 있었다. 치카노리는 사이고 타카모리(西鄕隆盛)를 동정하고 있었다. 그것은 타카모리가 메이지유신을 이룬 중심인물이면서, 그 자신 그 탄생에 관련된 군관에 이를 가는 입장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호시노는 소가쿠에게 당시의 정치, 군사적인 정세, 특히 가고시마에서의 타카모리의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고 여겨진다. 신관견습으로서의 수주간을 츠츠코와겐 신사에서 보내면서, 소가쿠는 치카노리를 떠나 융성군(隆盛軍, 반군)에 참가하기 위해 큐슈로 향한다.
도쿄, 오사카를 경유하여 큐슈로 향한 소가쿠는, 오사카의 고명한 검술가 모모노이 슌조(桃井春臟)의 쿄신메이지류(鏡新明知流) 검술도장에 들어가 한동안 수련을 한다. 소가쿠가 융성군에 참가하려고 해도 주변의 반대에 부딪혀 결실을 맺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소가쿠는 게획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가쿠는 고향에는 돌아가지 않고 그 후의 10년 정도를 일본의 남부제국을 돌아다니며 무사수행을 한다. 이 시기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아들`도키무네에 의해 이때의 소가쿠의 수행과 모험의 정황은 글로 남겨졌다.
이 무사수행 후의 소가쿠의 족적에도 상세한 자료는 없으나, 한동안, 후쿠시마에 귀향하여 결혼하고 2명의 아이를 얻는다. 또 1887년 경, 홋카이도 개발청의 장관이 된 타카모리의 동생`사이고 츠구미치(西鄕從道)를 따라 홋카이도로 건너간다. 이 시기부터 1890년대에 걸쳐 소가쿠의 무술수행은 계속되었고, 또 무술교수도 이 시기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된다. 또 소가쿠는 전술한 호시노 치카노리를 닛코도쇼구(日光東照宮) 및 후쿠시마현의 료젠신사(靈山神社)에서 수회에 걸쳐 방문하였다.
호시노 치카노리(이하 서술하는 건에 관해서는, 통상 사이고 다노모)가 다케다 소가쿠에게 대동류를 가르친 인물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이 설은 사이고 다노모와 다케다 소가쿠 및 유도에서 이름을 떨친 사이고 시로(西鄕四郞)와의 관계에 기초한다. 하지만 다노모는 회진번의 정치적 중요인물로서, 그의 일기를 포함한 대단히 많은 정보가 입수가능하지만, 다노모 연구가는 '사이고 다노모가 훌륭한 무술가로서 대동류 및 다른 무술을 교수했다'는 증거를 발견치 못하고 있다. 다노모의 흐름을 이었다며 칭하는 "대동류(大東流)"류파가 수없이 이름을 올려놓고 있으나, 그 증거가 될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기까지는, 그러한 설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어쨌든 19세기 후반의 약 20년 정도의 소가쿠의 활동을 서술하는 데에는, 그간의 소가쿠의 소재는 대단히 정확하게 확인이 가능하다. 입문장(入門帳)인 영명록(英名錄)과 사례록(謝禮錄)이 있기 때문이다. 다케다 소가쿠는 그 와중에서도, 그 자신은 글을 쓸 줄 몰랐지만, 교수에 관한 상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들에는 문인의 이름, 주소, 가르친 기술명, 교수료 등이 기재되어 있다. 예컨데, 1898년부터 1910년에 걸쳐 소가쿠의 활동지역은 토후쿠(東北)였다고 확인가능하다.
1910년, 소가쿠는 아키다현 경찰부장`다카라베 사네히데(財部實秀)가 일본 북단의 땅에 부임하였을 때 동행하여 홋카이도에 건너가, 그곳에 거주하게 된 것을 기화로 재혼했다. 홋카이도는 그의 이후의 본적지가 된다. 다카라베와의 일이 끝난 소가쿠는, 홋카이도의 각지를 돌며 대동류를 교수했다. 1915년 엔가루에서, 후일 아이키도를 창시한 당시 32세의 우에시바 모리헤이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다.
소가쿠의 기술에 경탄한 모리헤이는 그 즉시 소가쿠의 문인이 된다. 모리헤이의 대동류에 대한 집념은 와카야마현 타나베시 출신의 개척단원들이 살고 있던 하쿠류무라에 다케다 소가쿠를 불러 살게 할 정도였다. 소가쿠는 모리헤이의 집에서 한동안 기거하며(나중에 그 집은 소가쿠 자신의 것이 된다) 대동류를 모리헤이에게 교수했다. 하쿠류에 처`스에와 살던 소가쿠는 7명의 아이를 얻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대동류의 후계자 도키무네이다.
모리헤이는 대동류를 약 5년간 열심히 수련했다. 소가쿠가 자신의 후계자가 되지 않겠냐고 모리헤이에게 권했다는 것도 인터뷰(미공개이지만) 속에 기록되어 있다. 1919년 후반, 모리헤이는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집과 가재도구 일체를 소가쿠에게 남기고 급히 하쿠류를 떠난다.
그 후, 소가쿠와 모리헤이는 1922년, 소가쿠 일가가 모리헤이의 아야베의 집에 방문하면서 재회한다. 당시 오모토교 교단에 소속되어 있던 모리헤이는 오모토교의 데구치 오니사부로 성사의 권유로, 자택 내에 도장을 지어 대동류를 가르치고 있었다. 아야베에서의 체류가 끝나자, 소가쿠는 그를 대신해 대동류를 교수할 수 있는 '교수대리'를 모리헤이에게 수여한다. 두 사람의 관계가 이전 만큼 긴밀하진 않았어도 그 후 10년간에는 수회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 모리헤이는 조금씩 대동류에 수정을 가해, 결국 독자적인 무술` 아이키도를 형성한다.
1921년과 1922년을 빼면, 소가쿠는 1930년대 중반까지는 홋카이도의 땅을 거의 떠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1934년부터 소가쿠의 토호쿠, 간토(關東), 간사이(關西) 방면에서의 활동이 보이게 된다. 간토지구에서는 때때로 사가와 유키요시를 조수로 데려가 교수하며 돌아다녔다. 1936년, 오사카 아사히신문사에 모습을 드러낸 소가쿠는 우에시바 모리헤이에 무술을 가르친 사람이라 칭했다. 이 사건을 둘러싸고 여러가지 풍문이 돌고 있으나, 왜 소가쿠가 예고도 없이 나타나서, 1933년경부터 아사히신문 도장에서 가르치던 모리헤이와 바뀌었는지는 불명인 채로 남아있다.
어쨌든 소가쿠는 오사카에서 3년 이상 대동류를 교수하여, 1939년 히사 타쿠마와 도네다치 마사오에게 면허개전을 수여한다. 소가쿠에서서 이 최고위의 목록을 수여받은 것은 히사와 도네다치 뿐이다.
소가쿠는 만년을 대부분 홋카이도에서 지내며, 고령임에도 최후까지 지도를 계속했다. 1943년 4월 25일, 병으로 사망. 화장할 때, 소가쿠가 소지했던 영명록 등의 자료가 함께 불타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말도 있다. 소가쿠의 교수인생의 기록이 한동안 중단되어 있으므로, 이건 터무니 없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귀중한 기록 대부분은 보존되어 있어서, 무술사연구가는, 일본유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아이키도 탄생의 씨를 뿌린, 이 걸출한 무술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다케다 도키무네>
다케다 소가쿠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다케다 도키무네는 1916년, 하쿠류에서 가까운 유베츠에서 소가쿠와 스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소가쿠는 그 이전에 결혼해 몇 명의 아이를 두었다.) 도키무네는 부친의 아래에서 1925년 즈음부터 대동류의 수련을 시작했다. 소가쿠는 당연히 엄한 선생이었다. 1930년, 모친이 영화관의 화재로 사망, 누이와 동생의 뒷바라지가 도키무네에게 맡겨졌다.
도키무네가 부친에게서 대동류의 지도를 받게되자마자, 도키무네도 또 대단한 무술의 재능을 입음이 명확해졌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초반에 걸쳐 대부분 홋카이도에서 지낸 소가쿠는, 도키무네를 후계자로서 키우기 시작했다. 소가쿠가 1939년, 면허개전을 히사와 도네다치에게 수여하기 위해 오사카에 갔을 때, 도키무네가 동행했다. 이들 면허거전을 기록한 영명록의 권두에는 소가쿠와 도키무네의 이름이 나란히 쓰여진 '대동류합기유술총무장' 서명이 있다는 점, 같은 영명록에 '다케다 대선생 및 토키무네 님에게 면허개전의 기술을 지도받았습니다'라고 히사, 도네다치가 기입한 점도 주목할만 하다. 또 이때 찍은 스냅사진에도 23세의 도키무네의 모습이 보인다. 이를 보아서도 소가쿠가 자신의 뒤를 도키무네에게 잇게 하려했다는 점이 확실해진다.
지나사변이 발발하자 도키무네는 소집된다. 외국출병이 결정되었을 때, 자신이 귀국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도키무네는 소가쿠의 영명록 등의 자료를 사가와에게 맡긴다. 포로생활 후에 풀려난 도키무네는 아바시리(網走)에 거주하며, 홋카이도 경찰관훈련을 1946년에 수료. 경찰관 시절, 범인체포의 공로로 수회 표창받는다. 1951년, 야마다 수산공업주식회사에 입사. 1976년 정년퇴임.
1953년, 도키무네는 대동류의 본부도장인 다이토칸(大東館)도장을 설립. 오노하잇토류의 요소를 도입하여 대동류기법을 조직화하여, 다이토류아이키부도(大東流合氣武道)라고 이름붙인다. 이어서 대동류합기무도의 창시자로서 "종가"라 칭한다. 하지만 다케다 소가쿠의 "다이토류주지츠(大東流柔術)" 또는 "다이토류아이키주지츠(大東流合氣柔術)"의 후계자로서의 도키무네는, 그 역할과 입장을 구분하여, 아버지가 사용한 "총무장(總務長)" 또는 "본부장(本部長)"이라 칭했다. 소가쿠가 교수한 기술과 도키무네 자신이 형성한 합기무도의 차이는, 합기무도에서는, 다른 현대무도와 같이, 일반대중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1987년 11월 3일, 아바시리시 문화상 수상. 1989년 즈음부터 건강이 상해 만년은 입원생활을 한다. 1993년 12월 2일 사망.
<대동류합기유술의 현황>
대동류합기유술은 일본에 현존하는 유술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수련하고 있다. 다케다 소가쿠와 도키무네가 최초로 지도를 시작한 곳이므로, 도장은 홋카이도에 집중되어 있다. 도키무네에게서 면허개전을 받은 콘도 가츠유키 산하의 도장 및 대동관에서 분리한 여러 단체 이외에 4개 정도 주요한 대동류 조직이 있다.
- 대동류합기유술 타쿠마카이(琢磨會). 1975년, 히사 타쿠마의 기술을 보급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회원수로 따지면 최대의 조직이라 할 수 잇다. 모리 하카루 총무장이 인솔하며, 최근엔 해외에서의 활약이 눈부시다. 전문지도자로서는 카와베 다케시가 있다.
- 대동류합기유술 코도카이(幸道會). 호리카와 코도에 의해 1950년대에 설립되었다. 호리카와는 소가쿠에게서 교수대리를 허가받았다. 주로 홋카이도에 산하도장이 있다. 이 회를 인솔하는 것은 이노우에 유스케, 호리카와의 후계자이다. 故 요네자와 시게미는 코도카이에서 분파하기 전 1970년대부터 해외에서 지도를 행하였다.
- 대동류합기유술 롯포카이(六方會). 그 뿌리는 코도카이이다. 설립자 오카모토 세이고는 호리카와의 수제자였다. 도쿄에 주거를 옮긴 오카모토는 1977년에 롯포카이를 설립했다. 코도카이와 공통되는 점도 있으나, 오카모토의 기술에는 많은 새로운 공부가 더해져, 소프트한 대동류로 간주되고 있다. 1980년대부터 해외에서의 활약이 눈에 띈다.
- 사가와 도장. 도쿄에서 1998년 사가와 유키요시 사망 이후에도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사가와는 소가쿠의 초기 문인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 도쿄에 도장을 열어왔다. 사가와의 활동은 도장 내부에 국한되어, 문인을 받는 일이 흔치 않았다. 후계자는 우치노 코지, 기무라 타츠오 및 다카하시 켄 등의 수제자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