合氣道?2006/10/28 12:20

(2006/02/02일자 게시물 이동)

<대동류와 다케다 소가쿠>
현존하는 일본유술 중에서, 최근 눈에 띄게 알려지게 된 것이 다이토류아이키쥬지츠(大東流合氣柔術, 이하 대동류)이다. 이는 아이키도의 국제적인 성공에 힘입은 바가 크다 할 것이다. 20세기의 벽두 4반세기, 대동류의 발전과 교수에 생애를 바친 다케다 소가쿠는 아이키도 창시자 우에시바 모리헤이에게 기술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대동류와 아이키도의 사이에 보이는 복잡하고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는, 다음에 서술할 여러가지 과거의 사실에서 태어난다.

아이키도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대동류합기유술이 무도계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80년대 중반, 아이키도 전문지 '아이키뉴스(『合氣ニュ-ス』,당시 일영대역판)'에 게재된 일련의 기사에 의한 것이다. 이들 기사는, 다케다 소가쿠의 아들 다케다 도키무네, 그리고 사가와 유키요시(佐川幸義) 및 히사 타쿠마(久琢磨), 콘도 가츠유키(近藤勝之), 모리 하카루(森恕), 이노우에 유스케(井上祐助), 오카모토 세이고(岡本正剛), 그 이외의 대동류의 저명한 사범들의 협력을 기반으로 치러진 인터뷰로부터 만들어졌다.

그때까지는 다케다 소가쿠와 대동류에 관한 약간의 정보는 주로 아이키도 관계에서 나온 것 뿐으로, 다케다 소가쿠는 다수의 폭력사건에도 휘말려있었던, 괴벽을 지닌 괴퍅한 무술의 명인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무술사(武術史)적으로 보아도, 소가쿠와 대동류는 마이너스 이미지가 강했지만, 세월이 흐르고, 또 소가쿠를 직접 아는 많은 사람들의 증언이 출판됨에 의해, 소가쿠 관(觀)이 차츰 변화하여, 현재는 일본의 가장 대표적인 무술가의 한 사람으로서 손꼽히고 있다.

<다케다 소가쿠의 생애>
다케다 소가쿠는, 오늘날은 물론 그가 살았던 시대에서 볼 때도 특이한 삶을 산 인물이라 할 수 있다. 1859년, 후쿠시마현에서 태어난 다케다 소가쿠는, 어린 시절, 자택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장소에서 벌어진 회진전쟁(會津戰爭)을 목격하였다. 작은 체격에 반항심 왕성한 소가쿠 소년은, 이 싸움의 광격에 완전히 마음을 빼았겼다. 이 생생한 유아경험이, 분명 그를 무술가로 이끈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소가쿠의 아버지`다케다 소키치는 집안에서 내려오는 농지를 이어받은 향사(鄕士)였다. 교육을 받은 인물로서, 서당에서 가르치기도 하고, 마을 스모에서는 오오제키(大關)의 지위까지 받았다. 또 검술 및 봉술을 쓸 줄도 알아, 자택 내의 도장에서 가르쳤다.

소가쿠는 소년 시절부터 여러 무술을 접하여, 스모, 호조인류 다카다파 창술(寶臟院流高田派槍術), 오노하잇토류(小野派一刀流) 검술, 그 외 해당 지역의 무술을 배웠다고 전해진다. 13세 때, 천둥벌거숭이에 장난이 지나쳐 아버지 소키치에게 서당에서 쫓겨난 소가쿠는, 시종일관 아버지에게 상경하게 해줄 것을 조른다. 지키신가케류(直心影流)의 사카키바라 켄키치의 내제자가 되기 위해서였다. 사카키바라는 당시 무술계에서 유명한 도장을 갖고, 검, 봉, 창, 나기나타, 그 외 여러가지 무기술을 가르치고 있었다. 소가쿠는 도쿄의 사카키바라 도장에서 2,3년 집중적으로 수련을 했다고 전해진다. 소가쿠가 실제로 사카키바라의 밑에서 수행하였는지의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없기 때문에, 그 사실에 의구심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으나, 소가쿠가 대단한 검술가이기도 한 점은 부정할 여지가 없다. 소가쿠가 많은 무술을 배운 것은 분명하며, 또 자주 자신의 기술을 시험하기 위해 시합이나 결투을 했다.

소가쿠의 도쿄에서의 수행은 1876년 형 소카츠의 돌연사로 중단되었다. 신관(神職)이었던 소카츠가 사망했기 때문에, 소키치는 둘째 아들 소가쿠에게 그 뒤를 잇게 하여, 세상에 신망이 있는 이 직업을 갖도록 하려 했다. 그리하여 17세의 소가쿠 청년은 후쿠시마현 츠츠코와겐 신사(都都古別神社)에 가게 되었다.

궁사(宮司)인 호시노 치카노리(保科近悳)는, 예전에는 사이고 다노모(西鄕賴母)라는 이름으로 회진번(會津番)의 가신으로 일한 적도 있었다. 치카노리는 사이고 타카모리(西鄕隆盛)를 동정하고 있었다. 그것은 타카모리가 메이지유신을 이룬 중심인물이면서, 그 자신 그 탄생에 관련된 군관에 이를 가는 입장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호시노는 소가쿠에게 당시의 정치, 군사적인 정세, 특히 가고시마에서의 타카모리의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고 여겨진다. 신관견습으로서의 수주간을 츠츠코와겐 신사에서 보내면서, 소가쿠는 치카노리를 떠나 융성군(隆盛軍, 반군)에 참가하기 위해 큐슈로 향한다.

도쿄, 오사카를 경유하여 큐슈로 향한 소가쿠는, 오사카의 고명한 검술가 모모노이 슌조(桃井春臟)의 쿄신메이지류(鏡新明知流) 검술도장에 들어가 한동안 수련을 한다. 소가쿠가 융성군에 참가하려고 해도 주변의 반대에 부딪혀 결실을 맺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소가쿠는 게획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가쿠는 고향에는 돌아가지 않고 그 후의 10년 정도를 일본의 남부제국을 돌아다니며 무사수행을 한다. 이 시기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아들`도키무네에 의해 이때의 소가쿠의 수행과 모험의 정황은 글로 남겨졌다.

이 무사수행 후의 소가쿠의 족적에도 상세한 자료는 없으나, 한동안, 후쿠시마에 귀향하여 결혼하고 2명의 아이를 얻는다. 또 1887년 경,  홋카이도 개발청의 장관이 된 타카모리의 동생`사이고 츠구미치(西鄕從道)를 따라 홋카이도로 건너간다. 이 시기부터 1890년대에 걸쳐 소가쿠의 무술수행은 계속되었고, 또 무술교수도 이 시기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된다. 또 소가쿠는 전술한 호시노 치카노리를 닛코도쇼구(日光東照宮) 및 후쿠시마현의 료젠신사(靈山神社)에서 수회에 걸쳐 방문하였다.

호시노 치카노리(이하 서술하는 건에 관해서는, 통상 사이고 다노모)가 다케다 소가쿠에게 대동류를 가르친 인물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이 설은 사이고 다노모와 다케다 소가쿠 및 유도에서 이름을 떨친 사이고 시로(西鄕四郞)와의 관계에 기초한다. 하지만 다노모는 회진번의 정치적 중요인물로서, 그의 일기를 포함한 대단히 많은 정보가 입수가능하지만, 다노모 연구가는 '사이고 다노모가 훌륭한 무술가로서 대동류 및 다른 무술을 교수했다'는 증거를 발견치 못하고 있다. 다노모의 흐름을 이었다며 칭하는 "대동류(大東流)"류파가 수없이 이름을 올려놓고 있으나, 그 증거가 될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기까지는, 그러한 설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어쨌든 19세기 후반의 약 20년 정도의 소가쿠의 활동을 서술하는 데에는, 그간의 소가쿠의 소재는 대단히 정확하게 확인이 가능하다. 입문장(入門帳)인 영명록(英名錄)과 사례록(謝禮錄)이 있기 때문이다. 다케다 소가쿠는 그 와중에서도, 그 자신은 글을 쓸 줄 몰랐지만, 교수에 관한 상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들에는 문인의 이름, 주소, 가르친 기술명, 교수료 등이 기재되어 있다. 예컨데, 1898년부터 1910년에 걸쳐 소가쿠의 활동지역은 토후쿠(東北)였다고 확인가능하다.

1910년, 소가쿠는 아키다현 경찰부장`다카라베 사네히데(財部實秀)가 일본 북단의 땅에 부임하였을 때 동행하여 홋카이도에 건너가, 그곳에 거주하게 된 것을 기화로 재혼했다. 홋카이도는 그의 이후의 본적지가 된다. 다카라베와의 일이 끝난 소가쿠는, 홋카이도의 각지를 돌며 대동류를 교수했다. 1915년 엔가루에서, 후일 아이키도를 창시한 당시 32세의 우에시바 모리헤이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다.

소가쿠의 기술에 경탄한 모리헤이는 그 즉시 소가쿠의 문인이 된다. 모리헤이의 대동류에 대한 집념은 와카야마현 타나베시 출신의 개척단원들이 살고 있던 하쿠류무라에 다케다 소가쿠를 불러 살게 할 정도였다. 소가쿠는 모리헤이의 집에서 한동안 기거하며(나중에 그 집은 소가쿠 자신의 것이 된다) 대동류를 모리헤이에게 교수했다. 하쿠류에 처`스에와 살던 소가쿠는 7명의 아이를 얻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대동류의 후계자 도키무네이다.

모리헤이는 대동류를 약 5년간 열심히 수련했다. 소가쿠가 자신의 후계자가 되지 않겠냐고 모리헤이에게 권했다는 것도 인터뷰(미공개이지만) 속에 기록되어 있다. 1919년 후반, 모리헤이는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집과 가재도구 일체를 소가쿠에게 남기고 급히 하쿠류를 떠난다.

그 후, 소가쿠와 모리헤이는 1922년, 소가쿠 일가가 모리헤이의 아야베의 집에 방문하면서 재회한다. 당시 오모토교 교단에 소속되어 있던 모리헤이는 오모토교의 데구치 오니사부로 성사의 권유로, 자택 내에 도장을 지어 대동류를 가르치고 있었다. 아야베에서의 체류가 끝나자, 소가쿠는 그를 대신해 대동류를 교수할 수 있는 '교수대리'를 모리헤이에게 수여한다. 두 사람의 관계가 이전 만큼 긴밀하진 않았어도 그 후 10년간에는 수회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 모리헤이는 조금씩 대동류에 수정을 가해, 결국 독자적인 무술` 아이키도를 형성한다.

1921년과 1922년을 빼면, 소가쿠는 1930년대 중반까지는 홋카이도의 땅을 거의 떠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1934년부터 소가쿠의 토호쿠, 간토(關東), 간사이(關西) 방면에서의 활동이 보이게 된다. 간토지구에서는 때때로 사가와 유키요시를 조수로 데려가 교수하며 돌아다녔다. 1936년, 오사카 아사히신문사에 모습을 드러낸 소가쿠는 우에시바 모리헤이에 무술을 가르친 사람이라 칭했다. 이 사건을 둘러싸고 여러가지 풍문이 돌고 있으나, 왜 소가쿠가 예고도 없이 나타나서, 1933년경부터 아사히신문 도장에서 가르치던 모리헤이와 바뀌었는지는 불명인 채로 남아있다.

어쨌든 소가쿠는 오사카에서 3년 이상 대동류를 교수하여, 1939년 히사 타쿠마와 도네다치 마사오에게 면허개전을 수여한다. 소가쿠에서서 이 최고위의 목록을 수여받은 것은 히사와 도네다치 뿐이다.

소가쿠는 만년을 대부분 홋카이도에서 지내며, 고령임에도 최후까지 지도를 계속했다. 1943년 4월 25일, 병으로 사망. 화장할 때, 소가쿠가 소지했던 영명록 등의 자료가 함께 불타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말도 있다. 소가쿠의 교수인생의 기록이 한동안 중단되어 있으므로, 이건 터무니 없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귀중한 기록 대부분은 보존되어 있어서, 무술사연구가는, 일본유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아이키도 탄생의 씨를 뿌린, 이 걸출한 무술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다케다 도키무네>
다케다 소가쿠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다케다 도키무네는 1916년, 하쿠류에서 가까운 유베츠에서 소가쿠와 스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소가쿠는 그 이전에 결혼해 몇 명의 아이를 두었다.) 도키무네는 부친의 아래에서 1925년 즈음부터 대동류의 수련을 시작했다. 소가쿠는 당연히 엄한 선생이었다. 1930년, 모친이 영화관의 화재로 사망, 누이와 동생의 뒷바라지가 도키무네에게 맡겨졌다.

도키무네가 부친에게서 대동류의 지도를 받게되자마자, 도키무네도 또 대단한 무술의 재능을 입음이 명확해졌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초반에 걸쳐 대부분 홋카이도에서 지낸 소가쿠는, 도키무네를 후계자로서 키우기 시작했다. 소가쿠가 1939년, 면허개전을 히사와 도네다치에게 수여하기 위해 오사카에 갔을 때, 도키무네가 동행했다. 이들 면허거전을 기록한 영명록의 권두에는 소가쿠와 도키무네의 이름이 나란히 쓰여진 '대동류합기유술총무장' 서명이 있다는 점, 같은 영명록에 '다케다 대선생 및 토키무네 님에게 면허개전의 기술을 지도받았습니다'라고 히사, 도네다치가 기입한 점도 주목할만 하다. 또 이때 찍은 스냅사진에도 23세의 도키무네의 모습이 보인다. 이를 보아서도 소가쿠가 자신의 뒤를 도키무네에게 잇게 하려했다는 점이 확실해진다.

지나사변이 발발하자 도키무네는 소집된다. 외국출병이 결정되었을 때, 자신이 귀국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도키무네는 소가쿠의 영명록 등의 자료를 사가와에게 맡긴다. 포로생활 후에 풀려난 도키무네는 아바시리(網走)에 거주하며, 홋카이도 경찰관훈련을 1946년에 수료. 경찰관 시절, 범인체포의 공로로 수회 표창받는다. 1951년, 야마다 수산공업주식회사에 입사. 1976년 정년퇴임.

1953년, 도키무네는 대동류의 본부도장인 다이토칸(大東館)도장을 설립. 오노하잇토류의 요소를 도입하여 대동류기법을 조직화하여, 다이토류아이키부도(大東流合氣武道)라고 이름붙인다. 이어서 대동류합기무도의 창시자로서 "종가"라 칭한다. 하지만 다케다 소가쿠의 "다이토류주지츠(大東流柔術)" 또는 "다이토류아이키주지츠(大東流合氣柔術)"의 후계자로서의 도키무네는, 그 역할과 입장을 구분하여, 아버지가 사용한 "총무장(總務長)" 또는 "본부장(本部長)"이라 칭했다. 소가쿠가 교수한 기술과 도키무네 자신이 형성한 합기무도의 차이는, 합기무도에서는, 다른 현대무도와 같이, 일반대중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1987년 11월 3일, 아바시리시 문화상 수상. 1989년 즈음부터 건강이 상해 만년은 입원생활을 한다. 1993년 12월 2일 사망.

<대동류합기유술의 현황>
대동류합기유술은 일본에 현존하는 유술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수련하고 있다. 다케다 소가쿠와 도키무네가 최초로 지도를 시작한 곳이므로, 도장은 홋카이도에 집중되어 있다. 도키무네에게서 면허개전을 받은 콘도 가츠유키 산하의 도장 및 대동관에서 분리한 여러 단체 이외에 4개 정도 주요한 대동류 조직이 있다.

- 대동류합기유술 타쿠마카이(琢磨會). 1975년, 히사 타쿠마의 기술을 보급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회원수로 따지면 최대의 조직이라 할 수 잇다. 모리 하카루 총무장이 인솔하며, 최근엔 해외에서의 활약이 눈부시다. 전문지도자로서는 카와베 다케시가 있다.


- 대동류합기유술 코도카이(幸道會). 호리카와 코도에 의해 1950년대에 설립되었다. 호리카와는 소가쿠에게서 교수대리를 허가받았다. 주로 홋카이도에 산하도장이 있다. 이 회를 인솔하는 것은 이노우에 유스케, 호리카와의 후계자이다. 故 요네자와 시게미는 코도카이에서 분파하기 전 1970년대부터 해외에서 지도를 행하였다.
- 대동류합기유술 롯포카이(六方會). 그 뿌리는 코도카이이다. 설립자 오카모토 세이고는 호리카와의 수제자였다. 도쿄에 주거를 옮긴 오카모토는 1977년에 롯포카이를 설립했다. 코도카이와 공통되는 점도 있으나, 오카모토의 기술에는 많은 새로운 공부가 더해져, 소프트한 대동류로 간주되고 있다. 1980년대부터 해외에서의 활약이 눈에 띈다.

- 사가와 도장. 도쿄에서 1998년 사가와 유키요시 사망 이후에도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사가와는 소가쿠의 초기 문인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 도쿄에 도장을 열어왔다. 사가와의 활동은 도장 내부에 국한되어, 문인을 받는 일이 흔치 않았다. 후계자는 우치노 코지, 기무라 타츠오 및 다카하시 켄 등의 수제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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合氣道?2006/10/27 22:51
<개요 合氣道란?>

우에시바 모리헤이(1883-1969)에 의해 창시되어, 1950년대에 모리헤이 옹에 의해 완성된 현대무도의 하나. 종래의 일본무도가 가진 전투적요소에 정신성, 호신성을 가미한 이 모리헤이의 무도는 "화(和)"의 무도 "아이키도(合氣道)"로 불리게 되었다. 그 특징은, "시합"에는 중점을 두지 않고, 공격을 해오는 상대를 배려한다는 이념`윤리성에 중점을 둔 것이다. 시합형식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현대무도 중에서는, 가라데나 유도 등의 지명도는 없지만, 한편으로는 이 아이키도의 윤리성이 지금은 세계의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여, 전후(戰後)에 국제적으로도 알려지게 되었다. 또, 육체적인 힘에 기반한 무도가 아닌 점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생애에 걸쳐 할 수 있는 무도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요소가 되고 있다.

<상세 合氣道란?>

최근, 아이키도는 발생지 일본은 물론 해외에서도 알려지게 되었다. 이것은 과거 50년 동안, 아이키도가 착실히 발전해온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하지만, 전통무도로서 인식되고 있으면서도, 유도, 가라데, 쿵후, 태권도 등의 대중적인 무도와 혼동되는 경우가 많다.

아이키도가 이러한 무도와 다른 점은, 당연한 기술의 차이는 별도로 하고, 호신술에 중점을 두고 있는 점이다. 다른 동양무술이 공격기와 방어기의 양자를 두고 있는데 대해, 아이키도는 그 철학과 이념에 의해, 스스로 공격하는 기술을 갖고 있지 않다.

무술이 공격기와 방어기를 가지면, 당연히 스포츠적인 면이 강조되게 된다. 1964년 이래 올림픽 종목인 유도는 물론, 가라데, 태권도 등이 그 예이다. 이들 무술의 수련생으로서는, 호신술을 수련하기 보다도 시함에 참가하여 이기는 것이 보다 중요한 과제가 된다.

한편, 아이키도의 수행은, 호신기의 습득을 통하여 정신적인 성장을 추구한다. 이 아이키도의 정신성은, 수련하고 있을 때도 도장을 떠나 있을 때도, 수련생의 태도에 드러난다. 개조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그 철학 속에서, '합기란 적과 싸워 적을 부수는 기술이 아니다. 세계를 화합시켜, 인류를 한가족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정의내렸다.

숙련된 아이키도가는, 폭력에 접하면 그 공격을 제어하기만 하여, 상대를 상처입히지 않는 배려를 하는 것을 이상으로 한다. 진정으로 아이키도의 길을 가는 사람은, 자연히 높은 레벨을 추구한다. 대인관계에 관해서도, 사회생활에 관해서도, 거기에 잠재된 경쟁이나 폭력에 대해서는, 항상 민감하도록 유의한다. 수련에 의해 자신감이나 방심하지 않는 마음가짐, 통찰력 등을 양성하는 것으로, 경쟁하는 일을 사전에 예측하여 피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고도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는, 수년에 걸친 쉼없는 수행이 필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아이키도는 평생 계속할 수 있는 수행이다. 진심을 담아 꾸준히 하면 기술을 어디까지라도 늘려, 인간의 이해를 한층 깊게 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아이키도에 다다르는 길은, 다른 격투무술과 상이한 풍미를 갖게 되었다. 따라서 아이키도에 이끌린 사람은, 아이키도가 지닌 화합이나 투쟁해결의 이념에 공조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저 호신을 위하거나 시합에 이기기 위해 격투기의 습득을 원하는 사람은, 당연히 다른 무술을 선택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키도의 기술이 연약해서, 그러한 목적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이다. 개조 우에시바 모리헤이가 교수한 전통적 수련법에는 "예리함"이 나온다. 예를 들어 기술을 심하게 하더라도, 거칠고 난폭하게 되진 않는다. 강력한 관절기나 굳히기는 상대를 제압하여 몸의 자유를 구속하면서도, 상대를 다치게 하는 일은 없다. 본래는 상대를 다치게 하거나 죽일 수도 있는 아이키도의 기술이지만, 아이키도의 이념에 의해 그러한 파괴적인 행위는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역자 첨언; 1.'합기';'합기'라는 명칭의 합기계무술 특유의 지웃기법. 이에 독실한 오모토교의 신자이기도 했던 우에시바 옹은 '합기'를 '화합'이라는 일종의 종교적 개념을 첨가해 전파. 2.아이키도에도 선제공격기가 있으나, 대중화과정에서 크게 중점을 두어 교수하지 않을 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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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키뉴스(http://www.aikinews.com), 아이키도 저널(http://www.aikidojournal.com)의 편집장인 스탠리 프래닌 씨의 아이키도의 간략한 일본어판 소개입니다. 원문은 위 링크에 있으며, 흔히 알려진 영어판 소개와는 조금 다릅니다.

by 스탠리 프래닌
translated by 성주환(Aikidokr.net)
Posted by aikid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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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조(開祖) 우에시바 모리헤이(植芝盛平)>
오늘날의 전체 일본무도에서 아이키도의 특이성을 파악하는데는, 개조 우에시바 모리헤이를 알지 못하고는 불가능하다. 우리가 모리헤이라는 인물에 흥미를 갖는 것은, 그가 오늘날과는 다른 시대의 인간이었던 데다가, 그가 살았던 시대, 문화적 배경에 있어서도 이채로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모리헤이에게 보여지는 신현(神懸,접신(接神),신들림)적 사상은 오모토교(大本敎) 교리의 영향이 강하여, 오늘의 일본인조차 이해하기 힘들다. 만일, 아이키도의 기술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 이해는 훨씬 절망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기술이 있기 때문에, 언어나 문화의 차이를 넘어서, 아이키도의 진수에의 길을 누구라도 걸을 수 있는 것이다.
후일의 아이키도 개조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1883년 12월 14일, 와카야마현의 어항, 타나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요로쿠는 촌회의원을 수년간 재직한 자산가였다. 요로쿠의 괴력을 전하는 이야기도 남아있어, 날 때부터 상당한 무술을 사용하는 사람이었음이 추측가능하다.
3명의 딸 다음에, 처음으로 아들을 얻은 요로쿠의 기쁨은 컸다. 유소년기부터 병약한 모리헤이를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요로쿠는 여러가지 수단을 강구해, 모리헤이에게도 몸의 단련을 시켰다. 모리헤이의 학업은 중학 1년에 끝났다. 17세 때, 상인이 되기 위해 상경하여, 부유한 친척이 경영하는 문방구점에서 일했다. 이 잠깐의 도쿄 체재 중에, 텐신진요류(天神眞揚流, 기토류와 함께 유도의 모체 중 하나, 역주)에 입문, 야간수련을 하게 되었다. 이것이 모리헤이의 본격적인 무도수행의 첫 걸음이었다.
각기병을 앓게 된 모리헤이는 1년을 못채우고 도쿄를 떠났다. 타나베에 귀향한 후, 건강을 회복. 도쿄에서의 경험으로 스스로가 상인에 맞지 않음을 깨닫는다. 당시(러일전쟁 발발 전), 정부는 군력강화를 위해 병역지원자를 모집. 태생적으로 모험을 좋아한 모리헤이는 1903년 입대를 결심한다. 모리헤이의 무술의 재능은 총검 훈련에서 크게 발휘되어, 기량은 부대 내에서 1,2위를 다퉜다.
병역 기간중, 주둔지 오사카에서, 야규류(柳生流)의 지류(야규신간류(柳生心眼流)라고 생각됨))을 배운다. 이 야규류를 어느 정도까지 수련하였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모리헤이는 1906년 제대 후에도 타나베에서 야규류 도장이 있던 곳까지 때때로 방문했다.
제대 후, 타나베에서 수년이 흐르면서, 모리헤이는 앞으로 나아갈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아버지 요로쿠가 지역 청년들에게 유도를 가르치기 위해 코도칸(講道館)에서 지도원을 초청한 적도 있어, 모리헤이도 한때 유도를 배웠으나, 타나베에서 정착할 생각은 없었다. 이런저런 중에, 정부가 홋카이도 미개지의 개척`이주장려책을 발표. 새로운 모험에 이끌려, 모리헤이는 고향의 54가족을 이끌고 1912년, 홋카이도로 옮긴다. 일행은 홋카이도 북단의 땅에 정착하게 되어, 하쿠류무라(白龍村)가 탄생했다.
하쿠류무라의 이주민들의 생활은 농업이나 벌채의 힘든 노동에다가 홋카이도의 엄동설한이 더해서 힘겨웠다. 하지만 이 먼 땅의 고단한 생활에 굴하지 않고, 모리헤이는 타나베 출신 이주자들의 리더로서, 그들을 이끌고 원조하는 것이었다. 또 촌회의원으로서 활약한 시기도 있었다.
이 즈음 후일 아이키도 탄생의 중요한 영향을 끼친 사건이 일어난다. 유술의 달인` 다케다 소가쿠( )와의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다케다 소가쿠는 모리헤이보다 수년 일찍 홋카이도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유술을 지도하면서 도내를 돌아다녔다. 모리헤이가 소가쿠를 처음 만난 것은, 1915년 2월, 엔가루(遠輕)에서였다. 당시, 모리헤이는 32세, 무도의 재능에 눈을 떠, 어엿한 무도가였다. 하지만, 무술가로서 최전성기였던 소가쿠에게는,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소가쿠의 강력한 힘, 복잡한 다이토류(大東流, 이후 대동류)의 기술에 매혹된 모리헤이는, 이것을 배우기 위해서 시간도 비용도 아까워하지 않고, 소가쿠를 자택에 숙박시켜 개인교습을 받을 정도였다. 소가쿠에의 교습료는 타나베의 부친에게서 송금받아 충당했다.
소가쿠의 수제자 중 하나가 된 모리헤이는, 도내를 돌면서 소가쿠의 동행을 하기도 했다. 이 홋카이도 시절에 모리헤이는 소가쿠에게서 <비전목록(秘傳目綠)>을 수여받아, 대부분의 대동류의 기술을 습득하였다. 대동류에는 관절기 및 굳히기 등의 복잡한 유술기가 수백종류 정도 있다. 또한, 소가쿠는 검, 수리검, 철부채, 그 외의 무기술에 뛰어났다. 대동류합기유술은 모리헤이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쳐, 나중의 아이키도 기술의 기초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쿠류에서의 대동류 수련에 매진하던 모리헤이의 생활은, 1919년 12월, 한 통의 전보에 의해 무너졌다. 아버지 요로쿠의 병이 깊어, 바로 귀향하라는 것이었다. 모리헤이는 황급히 신변을 정리하고, 하쿠류의 집과 가재 일체를 소가쿠에게 넘기고, 타나베의 부친에게로 내달렸다. 그리고 다시 하쿠류에 돌아오는 일을 없었다.
타나베로 가는 도중에, 모리헤이는 한 나그네에게서 데구치 오니사부로(出口王仁三郞)라는 대단한 치유력을 지닌 종교가의 얘기를 들었다. 순간 모리헤이는, 오니사부로를 만나, 부친의 병 치유를 기도해달라는 데에 생각이 미친다. 그리고 오모코교 본부가 있는 교토근교의 아야베(綾部)를 방문했다. 오니사부로의 카리스마에 크게 감명받은 모리헤이는, 그대로 수일간 아야베에 머물렀다.
모리헤이가 타나베에 다다랐을 때에는, 요로쿠는 이미 세상을 떠난 상태였다. 사랑하던 부친을 잃은 정신적 타격은 컸다. 요로쿠의 사후 수개월간, 초췌한 모리헤이의 모습은 가족과 친구들을 걱정시켰다. 그 후 모리헤이는 데구치 오이사부로와의 만남이 잊혀지지 않아, 요로쿠가 죽은지 2,3개월 후, 아야베에 이주하기로 결심, 오모토교에서의 고행 생활에서 마음의 안정을 구하기로 한다.
모리헤이는 아내 하츠와 8세가 된 장녀 마츠코와 함께 오모토교 신자와 함께 생활을 시작했다. 신자들의 간소한 생활에 적극적으로 들어간 모리헤이는, 곧 오니사부로의 측근 중 한 사람이 된다. 모리헤이의 무술의 재능에 감명받은 오니사부로는, 무술에 흥미가 있는 오모토교 신자들을 가르치도록 권한다. 이것이 우에시바숙(植芝塾)의 시작으로, 모리헤이는 여기서 대동류유술을 가르치게 된다.
1922년, 다케다 소가쿠가 가족을 이끌고 모리헤이를 방문, 반 년 정도 아야베에 체류한다. 오니사부로는 괴퍅하고 의심 많은 소가쿠에게 호감을 갖지 않았다. 이것은 둘 사이에 낀 모리헤이를 당혹스럽게 했다. 오모토의 세계는 맘에 들어하지 않는 소가쿠였지만, 우에시바숙에서 많은 신자들을 가르쳤다. 또 체류가 끝날 무렵, 모리헤이에게는 교수대리(敎授代理)를 수여했다.
오니사부로에게는 수많은 커다란 구상이 있었다. 그 중의 하나, '만주에 이상적인 종교국가를 만든다'를 실현시키기 위해, 1924년 2월, 오니사부로는 모리헤이를 포함한 소그룹을 이끌고 중국대륙을 향해 출발. 이 목적을 오나수하기 위해, 오니사부로는 마족장군 장작림(馬族將軍 張作霖)에게 운명을 걸었다. 하지만 운 없게도 오니사부로와 그 일행은 중국 당국에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는다. 하지만 일본영사관의 개입에 의해 기적적으로 형을 면한다. 구류중의 오니사부로와 그 일행을 찍은 수 장의 사진이 그들의 무서운 체험을 증명하고 있다.
귀국 후, 모리헤이는 다시 아야베에 거주한다. 제자 중에 다수의 해군장교가 포함되기도 하여, 모리헤이의 무용은 곧 오모토교 외부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제자 중에는 독실한 오모토교 신자인 아사노 중장이 있었다. 아사노는 모리헤이의 기량을 해군 동료들에게 알렸다. 이것이 다케시타 이사무(竹下勇) 해군대장의 귀에 들어가고, 다케시타는 모리헤이의 기술을 한 번 보기 위해 일부러 아야베를 방문했다. 깊은 감명을 받고 귀경하자마자 다케시타는 도쿄에 모리헤이의 연무회와 강습회를 치를 준비를 했다. 모리헤이의 후원자 중에는, 수상을 2번이나 지낸 퇴역장군 야마모토 간베이(山本權兵衛)의 이름도 있었다.
다케시타를 비롯한 저명한 인물을 지원자로 갖게된 모리헤이가 오모토교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모리헤이에게는 플러스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수려한 유술 기법과 카리스마는 도쿄의 군부, 정계의 엘리트들의 사이에 평판이 높아, 1925년부터 1927년에 걸쳐 모리헤이는 수회 상경했다. 모리헤이는 최종적으로 오니사부로의 양해를 얻어, 가족이 도쿄로 이주했다. 그리고 무도교습을 전업으로 한 생활을 시작했다.
상경하여 3,4년은, 모리헤이는 지원자의 거실에서 수련했다. 지원자는 주로 군인, 정치가, 재계의 거물 등,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었다. 특히, 다케시타 대장은 모리헤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다케시타는 무도애호가여서, 한때는 스모협회의 이사로 재직한 적도 있다. 또 대동류를 10년 이상 수련하여, 자택을 수련장으로 개방하였다. 이러한 다케시타의 후원이 없었다면, 개조의 도쿄에서의 성공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모리헤이의 무술은, 명칭을 바꾸면서 차츰 알려지게 되었다. 이윽고 1931년, 다케시타 등의 조력으로 전문도장, 바로 코부칸(皇武館) 도장개설을 위해 자금이 모였다. 지금의 신주쿠에 탄생한 코부칸 도장은 현 아이키카이(合氣會) 본부도장의 전신이다. 코부칸 도장 시절의 제자 중에는 이노우에 요이치로(井上要一郞),도미키 겐지(富木謙治),모치즈키 미노루(望月稔),유카와 츠토무(湯川勉),요네가와 시게미(米川成美),시라타 린지로(白田林二郞), 시오다 고조(鹽田剛三) 등의 인물이 있다.
육,해군부의 접촉이 많았던 모리헤이는, 도야마 학교, 나카노 학교, 해군사관학교 등의 군사훈련시설에서 가르치기도 했다. 모리헤이가 바빠짐에 따라, 코부칸 도장의 수제자들이 이들의 훈련시설에 파견되는 일도 많았다.
모리헤이가 소가쿠의 대동류에 대해서 누차 얘기를 하였고, 대동류의 이름으로 제자에게 목록을 준 사실에서도, 이 시절의 한 시기, 모리헤이는 적극적으로 대동류합기유술을 가르치고 있었다고 하겠다. 하지만, 뭔가 강요하는 태도를 지닌 소가쿠와의 사이에는 차츰 골이 생겨, 모리헤이는 소가쿠에게서 멀어져갔다. 1935년 즈음부터는 모리헤이는 소가쿠와 적극적으로 만날 기회를 갖지 않은 듯 하다. 하지만, 대동류 기술은 모리헤이류로 형태를 바꾸어가면서도, 의연히 모리헤이의 기술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전쟁 전, 모리헤이가 자신의 무술에 즐겨 사용한 명칭은 '아이키부도(合氣武道)'였다.
이 와중에, 모리헤이는 오모토교를 비롯 오니사부로와는 밀접한 관계를 계속 했다. 오니사부로의 지시에 따라 오모토교의 활동의 일환으로서 만들어진 무도선양회(武道宣揚會)도, 모리헤이의 무도생활을 촉진하기 위한 것이었다. 무도선양회 지부는 대부분 오모토교회에 병설되는 형태로 일본 각지에 만들어졌다. 무도선양회는 강습회를 여는 등, 1931년부터 일본국사정권에 의한 오모토교 파괴의 1935년말까지 활동을 계속했다.
1930년대 말, 일본의 중국 및 동남아시아 진출이 시작되었다. 우에시바 문하의 젊고 우수한 사범 및 제자들이 징병되었다. 그 결과 코부칸 도장의 수련생도 줄어들어, 태평양전쟁이 발발할 즈음에는 도장의 활동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1942년, 장에 병을 얻어, 모리헤이는 토지를 구입해두었던 이바라키현 이와마촌에 은퇴하여, 전쟁의 색이 농후한 도쿄의 광란에서 벗어나, 농경과 수련과 명상의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개조가 이와마에서 이러한 나날을 보낸 것은, 전쟁 후의 아이키도 형성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처음으로 집중하여 무도탐구가 가능한 몸이 된 모리헤이는, 싸우지 않고 투쟁을 해결한다는 무도를 완성하기 위해, 전심전력으로 수련과 기도의 나날에 몰두했다.
종전을 맞을 즈음의 일본은 극심한 궁핍상태여서, 먹을 것을 확보하는 등,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이와마에는 제자들이 조금밖에 없었고, 전쟁 전의 제자들은 동남아시아 각지에 출병한 채로, 송환된 사람은 적었다.
대혼란에서 떨어진 이와마의 토지에 거주하면서 수년이 지나, 모리헤이는 본격적으로 아이키켄(合氣劍), 아이키조(合氣杖)의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무기술의 이해가 올바른 체술의 기본이 된다고 생각, 모리헤이는 무기술과 체술의 양쪽에 중점을 두었다. 이 시기에 모리헤이의 수련상대를 한 것이 사이토 모리히로(齋藤守弘)이다. 사이토는, 평소라면 절대 배우지 못했을 많은 기술 및 이치를 모리헤이에게서 흡수한다.
개조는 이 이와마 시절에, '타케무수 아이키(武産合氣)'의 개념을 만들어낸다. '타케무수 아이키'란, 어떤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무한히 기술이 태어나오는 상태를 말한다.
1950년대 후반 즈음부터, 모리헤이는 은거했던 이와마 땅에서 나와 활동을 시작하는 일이 많아졌다. 도쿄에서 수일을 머물고는 이와마에 돌아갔다. 또는 오사카, 와카야마 등에 있는 친구나 제자들을 방문했다. 초대에 응하여 나간 일도 많았다. 그 때문에, 지금 어디에 있는가, 언제 신주쿠의 아이키카이 본부에 모습을 드러내어 지도를 할 것인지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다.
전쟁 후에 입문하여 실제로 모리헤이의 지도 및 연무를 접한 많은 제자들은, 모리헤이의 기력이 넘치는 우아한 움직임, 무도에 윤리성을 구하는 자세에 매혹되었다. 모리헤이는 태생적으로 낙천적인 성격으로, 지도 및 연무를 하고 있는 때에 장난기를 발휘했다. 한편, 제자가 위험한 수련 및 진지함이 결여된 수련을 하면 그 즉시 화를 폭발시켰다. 어느 때의 모리헤이를 접했든지 간에, 그를 만난 사람은 평생 잊지 못할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만년, 건강이 쇠한 모리헤이는 대부분 도쿄에서 지내게 되었다. 젊은 시절과 같이 자유로이 움직일 수 없게 되자, 모리헤이의 기술에 변화가 일어났다. 기술의 대부분이 간략화되고, 손으로 가볍게 끌거나, 때로는 닿기만 한 채로 젊고 에너지 충만한 제자들을 던졌다. 이 즈음은 또 아이키도가 국제적으로 첫 발을 내딛은 시기이기도 하다. 공격자를 가볍게 손으로 처리하는 흰 수염을 휘날리는 왜소한 노인-이것이 많은 제자들 및 사범들의 가장 기억에 남는 모리헤이의 모습이 아닐까.
이러한 개조의 만년에 보이는 호흡에 의한 아이키도는, 말할 것도 없이 그때까지의 수행이 축적되어 나온 것이다. 모리헤이 자신도 즐겨 지적한 바와 같이, 바로 60년 이상에 걸친 수행의 결과물이다. 공개연무회 및 후일의 영화 필름의 등장에 의해, 모리헤이의 이러한 호흡기법은 많은 사람의 눈에 뜨이게 되어, 안이하게 모방하는 사람이 끝이 없다.
1969년 4월 26일, 모리헤이는 간암으로 서거했다. 계승자는 아들 우에시바 기쇼마루(植芝吉祥丸) 씨, 기쇼마루 2대 도주 서거(1999년)후에는, 손자인 우에시바 모리테루(植芝守央) 씨가 3대 도주가 되어 현재에 이른다. 재단법인 코부카이(皇武會)는 전쟁 후, 재단법인 아이키카이(合氣會)로 명칭을 새롭게 하여, 아이키도계에 걸쳐 톱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세계각지의 아이키도 조직(도장)의 과반수는 이 도쿄본부의 산하에 있다. 또 본부는 국제아이키도연맹(IAF)를 조직하여 해외에서도 활약하고 있다.(역주; 아이키카이와 IAF는 별개의 활동을 함.)
아이키카이 이외의 주요한 아이키도에는, 시오다 고조가 창설한 강력한 전쟁 전의 스타일에 중점을 둔 요신칸 아이키도(養神館合氣道), 도헤이 고이치(藤平光一)가 창설한 기를 강조하고, 아이키도 기술에 의한 건강법에 중점을 둔 신신토이츠 아이키도(心身統一合氣道), 도미키 겐지에 의해 시합형식을 도입한 일본아이키도협회(日本合氣道協會), 모치즈키 미노루에 의해 아이키도, 유도, 가라데, 검술 등의 요소를 도입한 종합무도` 요세이칸 아이키도(養正館合氣道) 등이 있다.
성숙기에 들어간 아이키도가 이후에도 차츰차츰 발전해갈 것임에는 의심할 바 없다. 일본 및 해외에서 활약하는 많은 사범들은, 모두 수련 및 지도에 40년 이상의 경험을 가진 베테랑이다. 또 수십 국어의 아이키도 관계서도 출판되어 있다. 아이키도 기술의 응용범위도 넓어, 경찰관계, 심리학, 심리치료학 등 많은 분야에 채택되고 있다.

 by 스탠리 프래닌
  translated by 성주환(Aikidokr.net)
  사진 출처; Aiki News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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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우림

    대선생님 관련 자료. 저희 카페로 퍼 가옵니다. 감사드립니다.

    2011/12/14 16:33

서기일본연호나이사항
1883明治16年와카야마현 타나베시에서 태어나다.(12월 14일)
1900明治33年17첫 상경(9월)
1902明治35年19타나베시에서 하츠와 결혼
1903明治36年20오사카 제3사단관 하 제37연대에 입대
1905明治38年22만주에 출정. 다음해 제대후 타나베에 귀향
1908明治41年25야규류유술의 면허를 나가이 마사카츠에게서 받음
1915大正4年32요시다 코타로의 소개로, 홋카이도 엔가루의 히사다 여관에서 대동류유술 다케다 소가쿠와 만남
1919大正8年36부친의 병으로, 홋카이도에서 귀향(12월)하던 중, 오모토교 성사(聖師) 데구치 오니사부로와 만남
1920大正9年37교토 아야베에 일가족 이주.
우에시바숙 개설.
1921大正10年38제1차 오모토교 사건
3남 기쇼마루 탄생(6월)
1922大正11年39다케다 소가쿠에게서 교수대리를 받음(9월)
1924大正13年41데구치 오니사부로와 함께 몽골로 감(2월~7월)
1927昭和2年44교토 아아베에서 일가족 상경
1930昭和5年47가노 지고로(유도 창시자)가 내방하여, 옹의 연무를 보고, 코도칸에서 모치즈키 미노루 외 문하생 몇 명을 연수를 위해 파견
1931昭和6年48코부칸 도장 낙성
1932昭和7年49대일본무도선양회탄생, 초대회장에 취임
1933昭和8年50기술서 '부도렌슈(무도연습)' 출판
1938昭和13年55기술서 '부도(무도)' 출판
1940昭和15年56재단법인 황무회 발족, 초대회장 다케시타 이사무 해군대장
1941昭和16年58다케시타 이사무 대장의 활동으로 재녕관에서 천황 앞에서 연무를 행함
헌병학교 등에서 지도
1942昭和17年59정식으로 '合氣道'라고 호칭함
이바라키현 이와마에 은거
1943昭和18年60이바라키현 이와마에 합기신사 건립
1945昭和20年62재단법인 황무회 도장의 활동정지
이바라키현 이와마에 아이키도 야외도장 낙성
1948昭和23年65이와마에서의 집중수행기간
재단법인 합기회 발족
1956昭和31年73다카시마야 옥상에서 전쟁 후 최초의 일반공개연무회 개최
1960昭和35年77제1회 아이키도연무대회 개최(야마노 홀)
자수훈장 수상(11월)
1961昭和36年78하와이 아이키카이에 초청된(2월)
1964昭和39年81훈4등구일소수장을 수상(11월)
1968昭和43年85아이키카이 본부도장 낙성(1월)
1969昭和44年861월 15일 신년첫수련에서 최후의 연무를 행함
4월 26일 사망
정5위훈3등단보장 수여
by 스탠리 프래닌   translated by 성주환(Aikidokr.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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合氣道?2006/10/27 22:28
(04/07/05일자 게시물 이동게시)
대한아이기도연맹이 '대한아이키도연맹'으로 개칭하도록 지난 토요일(7/3) 연맹총회에서 결정되었습니다. (2006.2. '대한합기도회'로 개칭)
이제부터 아이기도라는 용어 대신 아이키도라는 용어로 통합될 것입니다.

이유는 '현행외국어표기법을 준수하자'는 매우 간단한 것이지만, 그간 나름의 속앓음이 있었습니다.

故 우에시바 모리헤이 옹이 창시한 일본현대무도를 한자로 '合氣道'라 쓰고, 우리말로는 '합기도'라 읽고, 중국어로는 '허치다오', 일어로는 '아이끼도-'라고 읽습니다. 한자문화권이므로 자국내에서는 자신들의 발음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이치에 맞을 것이고, 중국어권에서는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위 무술을 국내에 정식보급을 시작할 때 이미 동일한 한자에 같은 국어발음의 다른 무술이 존재하고 있으므로, 한자문화권이면서도 원어발음을 사용하게 되었던 겁니다.

현행외국어표기법에 따르면 '아이키도'가 맞습니다만, 자의반 타의반으로 '아이기도'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던 이유는 10여년전 제 스승께서 보급하고자 하는 무술을 소개할 때 일본것이라면 무조건 우선 배타적으로 보는 시각이 지금보다도 훨씬 강했던 터라, 조금이라도 거부감을 줄여보고자 한 시도중의 하나가 '아이키도'에서 '아이기도'로 발음을 약간 순화시키는 것이었던 겁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우선 현행원칙에 맞지 않으며, 수년간의 보급과 저변확대, 인식의 전환에 따라 저희의 의도와는 별개로 아이키도로 표기하시는 분들이 많고, 아이기도란 표기가 오히려  자신의 소속을 나타내는 어찌보면 편을 가르는 호칭이 되어버리는 부작용도 조금씩 보이는 것을 우려했기에, 원칙적인 표기를 준수하자고 건의하였던 적이 있는데, 사실 그간 잊고 있었다가 이번 총회에서 안건으로 올라와 참석자들의 찬성으로 통과된 것입니다. 제자의 건방져보일 수 있는 건의를 잊지않고 받아주신 스승께 감사했습니다.

위 내용은 어찌 보면 정말 별 것 아닌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불모지에서 무엇인가를 처음 시작하는 개척자는 작은 것에도 시행착오를 겪게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저는 가끔 이렇게 묻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윤대현 관장이 없었다면, 현재의 한국무술계에 이만큼의 아이키도의 정통`정식 보급과 저변확대, 合氣에 대한 이 만큼의 관심과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요?
이분만큼 자신의 재산과 지위를 버려가며 아이키도를 불모지에 싹틔운 분이 있었나요?

지금 국내에서 아이키도를 지도하거나 배우고 있는 사람들, 아무리 적게 잡아도 9할 이상은 윤대현 관장의 이러한 노력의 과정과 결과를 직접적으로 수혜받고 있는 것입니다. 윤대현 관장에게 배운 지도자들, 도우들은 자신이 스승에 비해서는 얼마나 수월하고 편하게, 값싸게, 시행착오를 훨씬 겪지 않으면서 아이키도를 익혔는가, 익히고 있는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받는 혜택만큼, 정당한 보답을 해야 합니다. '이 정도에 대가를 지불해야 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자신이 스승으로부터 필요한 것의 대가에 대해, 스승은 그것을 얻기 위해 십수배의 노력과 대가를 지불했다는 것은 생각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공짜를 바라는 것은 자기 분수를 자각하지 못하고 욕심이 큰, 얼굴이 두꺼운 짓입니다. 반대로 내가 힘겹게 노력하고 대가를 지불하여 얻은 것을 수이수이 그냥 준다는 것은, 사리사욕이 없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길게 보면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의 가치를 평가절하시킬 수도 있다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요는 정당하고 정확한 평가와 가치교환입니다.

제 스승 윤대현씨께서는 아이키도라는, 合氣라는 인생의 목표를 얻게 된 후, 이제까지 쌓아온 화려한 경력, 부와 명예를 모두 뒤로 한채 위 무술의 올바른 보급에 노력해오신 분입니다.
저는 학창시절 약간은 치기어린 연유로 스승과 인연을 맺어 지금까지 모시고 있습니다. 스승과 솔직한 대화를 가장 많이 나눈 제자 중의 한 명이라 자부하며, 바로 옆에서 갖고 있던 차를 처분하고, 보다 단촐한 곳으로 이사하면서도 당신의 스승과 지인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고민하는 등의 어려움을 보아왔습니다.

겨우 몇가지의 기술, 느낌을 얻고자 비싼 돈을 들여가며 외국을 오가고 자료를 모으고 우리보다 조금이라도 앞선 선생을 돈들여, 아니면 우의를 통해 들러라도 가라며 초빙하느라 언제나 적자입니다. 시쳇말로 집몇채를 살 돈을 날렸습니다.

그러한 스승이 남들에게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하거나, 오히려 정말 어처구니 없을 정도의 모함을 받는 것을 보게될 때, 제자로서 그보다 더 안타깝고 화가 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반성하고 앞을 보면서, 당신의 현수준에 만족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난 아직 한참 멀었다'며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완벽한 인간이 될 수는 없는지라 결점도 물론 있으며 서운할 때도 있지만, 이러한 청렴함과 우직함을 잘 알고, 그 노력과 향상, 발전을 보고 느끼고 있기에, 스승으로서 존경하고 길잡이로서 변함없이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즐거운 하루가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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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주빈

    진즉 이글을 읽었다면 전단지에 아이키도라 했을텐데 아쉽습니다.
    저의 집사람도 아이기도 보다 아이키도가 더 좋다고 해서 아~~ 내가 실수를 했구나 했는데
    .....
    개척이라는 것 불모지에 새로운 꽃을 피운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것이 아닌가 봅니다
    주말마다 대구로 그리고 서울로 올라다니면서 금전적으로 버겁다는 생각이 들때가 한두번이 아닌데... 윗글을 읽어보니 선생님이 대단하시기도 하고 숙연해 지기도 합니다.
    그래도 인간이 간사한지라 제 힘든것만 생각하게 됩니다

    2011/01/07 13:13
合氣道?2006/10/27 22:26
아이키도는 옛 유술의 풍취가 남아있는 현대무도이다. 기술적으로도, 예를 들면 유도에서는 시합에서 쓰이면 위험하므로 사용하지 않아 쇠퇴해져 버린 옛 유술의 기술이 많이 남아있 다. 또한 맨손으로 무기를 가진 상대를 쓰러트리는 기술을 매일같이 연습하여 익히는 것 도 (군대나 경찰들의 훈련을 빼면) 아이키도 뿐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투쟁을 부정하는 아이키도에서는 시합을 하지는 않는다. 공격자와 방어자를 나누어 약속 한 기술을 걸고 받는 '약속수련'이 있을 뿐이다. 이렇기 때문에 실전성에 대한 의문도 제 기된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전해지는 '합기'(合氣)의 기술과 정신, 일본무도가 도달한 최고의 경지라고도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아이키도의 실체는 물리학과 역학 그리고 인체공학을 최대한 활용한 과학적이며 또한 신비한 격투기이다.

  고류유술(古流柔術)에서 아이키도로

      아이키도의 개조 '우에시바 모리헤이'에게 영향을 준 고무술(古武術)은 여러 가지이다.  '기도우류'(起倒流)·'덴진신요우류'(天神眞楊流)·'야큐우류'(柳生流)의 유술, 강도관(講道館)유도, '신가게류'(新陰流)·'가시마신도우류'(鹿島新當流)의 검술, '호우조우인류'( 藏院流)의 창술 등이나, 그가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다이또류우쥬우쥬쓰'(大東流柔術)이다. 대동류는, '회진'(會津)¹에 비밀히 전해지던 유술이라고 알려져있다. 하지만, 대동류중흥의 아버지라 하는 '다께다 소가꾸'가 세상에 알리기 전까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유파이며, 그 계보와 실체는 아직도 제대로 알려져있지 않다. 그 최대의 특징은 '합기'(合氣)라고 하며, 이것 또한 정체가 판명되지 않은 특수한 기술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대동류에는 방대한 양의 기묘한 관절기가 존재한다.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대동류의 기술을 오랫동안 익혀, 다께다가 가장 신뢰한 제자가 됐다. 우에시바가 후에 대동류에서 나왔는데, 계속 있었다면 그가 대동류의 후계자가 됐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을 정도였다. 결론적으로, 아이키도는 많은 무술을 체험한 우에시바 모리헤이가 일단 그것들의 기술을 전 부 버린후, 자신의 이념에 맞추어 다시 만든 것이다. 타인을 다치게 하는 격한 기술이나, 힘에 의존하는 강한 기술을 없애고, 상대의 힘을 거스르지 않으며 자연스러운 움직임 속에서 상 대를 제압하는 기술을 종합한 격투기이다.

※ 1.회진 : 현재의 후꾸시마(福島)현으로, 과거 근대 일본에서 반란이 일어났던 곳으로, 무사 들이 많았으나 이 반란으로 많이 몰살되었음. 유도의 '사이고 지로'가 이곳 출신임.

아이키도 조직의 역사와 현재상황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당초, 아이키도의 일반보급에는 무관심했다. 무술의 명칭도 처음에는 '합기유술'(合氣柔術;아이키 쥬우쥬쓰)였으나, 이후에 이념을 수정하게 되어 명칭을 바꾸었다. 현존하는 조직인 '합기회'(合氣會;아이키가이)는 1942년에 만들어져서, 2차대전 이후 일반에게도 아이키도가 널리 알려지게 됐다. '아이키가이'는 '재단법인'이며, '전 일본 합기도연맹'(젠 니혼 아이키도 렌메이), '전국 학생 합기도 연맹'(젠고꾸 가꾸세이 아이키도 렌메이)등의 외부단체를 가지고 있다. 또한 1975년에는 '국제 합기도 연맹'(고꾸사이 아이키도 렌메이)가 결성되어 아이키도는 60개국에 보급되었다. 또한 아이키도조직에는 '양신관'(료신칸;養神館), '기의 연구회'(기노 렌구카이), '일본 합기도 협회(니혼 아이키도 교우가이), '당목류(當木流;도미키류))'등의 몇 개의 분파도 존재하나 이 것은 전체적으로 볼 때 소수이다.

격투이념

상대와 싸우지 않고, 상대의 '기'를 자연스럽게 자신의 '기'에 흡수하여 일체화하는 것이 아이키도의 이념이다. 싸움을 미연에 방지하며 실제로 기술을 쓸 단계까지 가지 않고 끝나는 것을 이상으로 하나, 부득이 기술을 써야할 때라도 서로 힘으로 부딪쳐 맞서는 것은 피한다. 그리고 상대의 힘을 흡수하며 상대가 다치지 않도록 노력한다. 기술적으로는 '간격'과 '몸 제어하기'(運身)을 중시하여, 아이키도의 정수는 이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아이키도 움직임은 '원운동', '구운동', '나선운동'이 주체가 된다. 이것들의 움직임으로 힘을 흡수하므로, 흐르는 듯한 화려한 기술이 가능한 것이다.

또한 실전에서는 '당신기(치기,차기,찌르기)'도 중시한다. 기본적으로 당신기로 상대를 쓰러트리려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신경을 어느 '한 곳'으로 집중시키기 위해 반복하는 것이다.

유니폼외 기타.

연습시에는 아이키도복을 입는다. 디자인은 공수도복이나 유도복등과 거의 동일하다. 몸에 알맞아 움직이기 편하며 스마트하게 보이기 위해 심플한 것을 주로 사용하나, 편을 나눠 연습 할 경우를 생각하면 약간 색이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초보자의 경우에는 발놀림이나 허리의 이동을 지도자가 보기 쉽게 하기 위해 '하카마'의 착용 은 금지한다. (여자의 경우에는 예외가 되기도 한다) 유단자는 하카마를 입을수 있다. 방어용 호구등은 전혀 없다.
Posted by aikid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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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주빈

    좋은글 감사합니다

    2011/01/07 1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