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 있는 친우 조 보웬이 예전에 내게 한 말이 있다. '홈마 선생의 별명은 빅 마우스(Big mouth)야.'
'수다쟁이'란 뜻인데, 과연 홈마 선생은 일단 뵙게 되면 정말 많은 말을 속사포처럼 쏟아내신다.
하지만, 그 말씀이 후학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아이키도의 정신에 대해서 알려주고자 하시는 마음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알기에 전혀 지루하지 않다. 게다가 선생의 말솜씨는 발군이다.
10월 15일 저녁 7시에 대한합기도회 본부도장에서 홈마 선생을 모시고 치른 특별수련 역시 홈마 선생의 현란한 이야기의 성찬이었다. 한국에 오시기 전, 미얀마와 필리핀 민다나오를 들르고 오신 선생은 현지에서 학교 건축 공사 중에 무너진 담벼락에 의해 다리가 불편하심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으로 강의해주셨다.
'여러분들을 필리핀 민다나오에서 가르치던 바로 그 학생들이라 생각하고 이 시간을 진행하겠습니다.'
민다나오는 가톨릭 국가인 필리핀에서 이슬람국가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무장단체 중 가장 악명높은 '아부 사야프'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내가 동티모르에서 근무하던 시절, 동료 필리핀 경관들 및 뉴스에서도 아부 사야프에 대해서는 자주 보고 들은 바가 있다. 아부 사야프의 본거지로 출동한 필리핀 해병대가 전원 몰살당한 후, 시체를 잔혹하게 훼손 후 전시하였다는 뉴스는 동티모르의 필리핀인 커뮤니티 내에서도 큰 이슈였다.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서로 증오하여 죽고 죽이며, 군대조차 가기 꺼려하는 바로 그 지역에 홈마 선생은 학교를 지으러 다녀오신 것이다.
'총이 있는 시대, 특히나 민다나오와 같이 쉽게 총을 구할 수 있는 곳에서 과연 무술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그럼에도 젊은이들은 강함을 추구하여 무술을 배우길 원한다. 그렇다면 무술을 통해서 이들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선생은 아이키도의 기술 단 3가지를 전하고 오셨다.
우선 엇서한손잡기 전환.
'A라는 힘과 B라는 힘이 만나서, 다시 새로운 C방향으로 함께 간다. 상대가 내게 어떤 힘을 작용시킬 때 중요한 것은, 상대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물어보는 것. 그리고 내가 먼저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것.'
다음으로 맞서한손잡기 입신던지기 입신(오모테)에서 전환(우라)로의 변환.
'입신던지기를 할 때 상대가 버티면 어떻게 해야 하나? 주먹으로 그의 면상을 치거나, 발로 그의 낭심을 차야 하나? 이렇게 물어보면 모두들 아니라고 답한다. 그렇다면? 그가 가고자 하는 방향이 어디인지를 파악하고 내가 먼저 움직이면 새로운 찬스가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맞서한손잡기 손목뒤집기.
'비틀어 꺾지 않는다. 꺾이도록 해야 한다. 역시 상대가 버티면 그가 원하는 바를 정확히 파악하여 내가 먼저 움직여야 한다. 그럼으로써 새로운 찬스를 얻는다.'
위 3가지 기술에서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볼 것, 내가 먼저 적극적으로 움직일 것, 그럼으로써 새로운 찬스를 얻을 것'이다.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지고 으르렁거리는 학생들, 불투명한 미래에 좌절하여 무기력함에 빠진 젊은이들에게 아무리 말로 '사이 좋게 지내야 한다. 싸우면 안 된다. 희망을 가지라'고 가르쳐봤자 별다른 소용이 없다. 살아남고자 강함을 추구하여 무술을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아이키도의 술기만을 가르친다면, 그저 또다른 형태의 '살인기술의 전수'와 다르지 않다.
'사람은 마음에 따라 몸이 움직인다고들 한다. 하지만 몸이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마음이 변하기도 한다.'
선생은 아이키도의 기술 단 3가지를 지도하면서, 이들에게 새로운 시야를 부여하고, 행동을 통하여 심성을 교화할 것을 꾀하신 것이다.
'무술을 하는 이들은 절대적인 강함을 추구한다. 우에시바 큰선생 역시 절대적인 강함에 대해 고민했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절대적인 강함은 싸우지 않음으로써 얻게 된다는 것을. 그것이 아이키도가 여타 무술과 본질적으로 차이를 보이는 지점이다.'
수련 후 식사 자리에서, 홈마 선생께서는 그의 네트워크 A.H.A.N(Aikido Humanitarian Active Network)의 유래를 설명해주셨다. 아시아를 뜻하는 '亞'와 모범을 뜻하는 '範', 이 두 글자를 따서 '亞範'('範'은 일본어로 '한'이라 읽힌다). 아시아가 세계의 모범이 되어주길 바라는 뜻에서 위 두 글자를 딴 것이고, 솔직히 영문명칭은 짜맞춘 것이라고. 46년간의 아이키도 인생 동안, 40여개국 이상에서 70여개의 도장을 세운 선생은 자신의 도장 '니폰칸' 이외에 어떠한 지부도 만들지 않았다. 선생과 뜻을 함께 하는 도장들을 동료로 맞아들였을 뿐, 조직의 구성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해외를 경험하고자 하는 아이키도인들에게 선진국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관심을 두지 않는 개발도상국에 가볼 것을 권유하며 그것이 진정한 '무자수행'임을 설파하고, 60세가 넘은 지금 자신의 네트워크의 이름 AHAN에서 이제 Aikido를 빼고 좀 더 시야를 넓히고자 고민하는 그는 내게 '언제나 현역인 존경스러운 선생'이시다.
노파심에서 적는 얘기. 홈마 선생의 말씀도 그렇고, 내 경험으로도 그렇고,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평화를 사랑하고 싸움을 싫어하는 이들이다. 어느 종교나 과격 근본주의자들이 그 가르침에 반하고 있을 뿐.
2010/10/18 19:56TRACKBACK FROM AikidoKR.NET since 1997
seminar-1 seminar-2 얼마 전 한국의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인터넷에서 '실전에 강한 무술'에 대한 설전이 벌어졌는데, '합기도(Aikido, 아이키도)는 강하지 않다.'는 얘기가 나왔다고 한다. 흥분한 그에게 나는 이렇게 말해주었다. '저는 경찰관이고 아이키도 지도원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곳 동티모르에 와서, 매일 싸우고 죽고 죽이던 무술 그룹들을 한 자리에 모아 우호연무대회를 열었습니다. 어느 게 가장 강한 무술입니까?' A c..
http://www.nippon-kan.org/senseis_articles/09/the_beginning/the_beginning.html
You can read the original article in English through the link above.
- 원문은 위 링크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홈마 선생의 전기, 꼭 사보고 싶군요.
- 이 번역문을 꼭 제가 바라는 누군가께서 읽어보시고 조금이나마 위안이 된다면 너무나 기쁘겠습니다.
니폰칸의 초창기
서문
니폰칸 창립자
홈마 가쿠(本間學)
며칠 전 나는 50대를 지나 새로운 갑자로 들어섰다.; 최소한 일본식의 생일계산상으로는. 내가 더 이상 생일 축하를 큰 파티나 많은 즐거운 일들로 꾸미지 않기로 결심한 것은 거의 20년 전의 일이다. 지난 몇 년 간 나는 크리스마스나 신년 축하자리에 참석하는 것조차도 그만두었다. 대부분의 내 제자들은 이를 이해하고 있다. 특히 나를 오랬동안 알아온 이들은. 나는 이를 내 삶에서 경험한 철학의 반영으로서 행하고 있으며, 이것이 내게 편하다.
내가 미국에서 '선생'으로서 생활한지는 37년이 되었다. 제자들이 생일 파티를 아주 크게 벌여서 선물이나 현금`수표가 들어간 축하카드를 뜯는 데만 30분 이상 걸렸던 적도 있다. 내 스스로 그러한 파티나 선물을 바랐던 적도 있다. '선생'으로서의 삶에 있어서 이는 그리 특이한 일이 아니었다.
하루는, 특히나 거창했던 파티 다음에 찾아온 엄청난 숙취 속에 깨어났는데, 나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건 미친 짓이야.",나는 생각했다. "이건 내 생일을 축하하는 온당한 방법이 아니야." 다음 해에 나는 제자들에게 파티 대신에 시에서 주관하는 자선 프로젝트에 함께 참가할 것을 권했다. 이 전통은 여전히 존중되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지금의 AHAN(아이키도 인도주의 행동 네트워크, the Aikido Humanitarian Active Network)의 시발점이었다.
또한 나는 AHAN으로서 여행하면서 세계의 미개발 국가들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를 깨달았다. 순전히 생존을 위해 살거나 전쟁의 참상, 빈곤, 질병 등을 목격한 사람들을 만나고 알게 되었으며, 이는 내 삶과 가치관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
니폰칸은 지난 37년간 내 꿈 또는 예상을 넘어서 발전했다. 오늘날 AHAN 니폰칸은 "봉사하는 무도(Engaged Budoism)"을 기치로 내걸고 세계 곳곳의 친구들과 함께 글로벌한 수준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우리는 언제나 아이키도 도장이며 우리의 조직도 아이키도에 맞춰져 있었지만, 최근 우리의 포커스는 아이키도 수련을 넘어선 많은 프로그램들을 포함하는 것에까지 확장되었다. 기본적 생계와 보살핌을 더욱 필요로 하는 어린이들을 돕는 것이다.
니폰칸의 모든 역사를 아는 제자들이 아주 드물다. 많은 제자들이 니폰칸이 현재의 위치로 옮기기 전이나 도장조차 없던 시절에 니폰칸이 어떠했는지 알지 못한다.
최근 제자들로부터 많은 편지를 받았는데, 그 대부분은 어떻게 독립도장으로서 성공할 수 있는지 또는 우리가 지금 하고 있듯이 도장과 문화센터를 함께 운영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니폰칸의 역사나 그 성공과 실패의 핵심을 가르치는 것은 쉽지 않다. 수년 간의 노력이 축적되어 온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줄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은,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향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나아가는 것이다. 하루 하루, 조금씩 조금씩, 한 걸음 한 걸음. 마법의 해답 따위는 없다.
아마도 니폰칸이 현재 가고 있는 길이 "산꼭대기에서 명상중에 불현듯 떠올랐다"고 말한다면 보다 신비롭기야 하겠지만, 사실 이것은 "엄청난 숙취 다음날 아침"에 떠오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뜻하는 바는, 누구라도, 나처럼 젊은 시절 "노는 데" 잔뜩 시간을 보낸 사람조차도 이러한 동일한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목표나 꿈이 없이는 공허하다. 이들은 우리의 삶에 의미와 희망을 부여한다. 그러나 단지 목표나 꿈을 갖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저 하늘만 바라보면서 깨달음을 구하거나 꿈이 이루어지길 바랄 수는 없다. 때로 목표가 희미해지거나, 샛길로 빠지기도 한다. 이것은 흔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모든 목표에는 노력이 깃들어야 하는 것이지, 저 혼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내딛는 한 걸음, 타협의 한 턴, 모든 전환(텐칸)들이 목표를 향해 당신을 한 걸음 다가가게 만든다. 내딛은 걸음은 결코 허비된 걸음이거나 뒷걸음이 아니며, 모든 걸음은 앞으로 향해야 한다. 제자리에 머물지 말고, 만일 목표나 꿈이 변한다해서 걱정하지 말고, 그저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면 기회가 스스로를 드러낼 것이다.
2006년에 나는 니폰칸 웹사이트에 "땅을 굳게 내딛으며(Walking Firmly on the Ground)"라는 글을 썼다. 그것은 한 일본의 카리스마 넘치는 가라데 마스터가 한 소년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과 그의 구도(求道)에 대한 것이었다. 간단히, 그 소년은 우선 세발 자전거, 다음으로 두발 자전거, 마침내 외발 자전거를 마스터했다. 외발 자전거는 정상에 오름을 뜻하고 챔피언이 되었음을 은유한 것이다. 그 글에서 내가 썼듯이, 난 이 이야기에는 또 한 챕터가 더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접근은 마치 별을 따려고 대나무 장대질을 하는 것과 같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는 모두 인간으로서 땅에 맨발을 내딛으며 삶을 시작한다. 자라면서 우리는 우리의 소유물을 싣기 위한 두발 수레가 필요할 거고, 다음으로 세발 수레, 또 다음으로 네발 리어카, 자동차 또는 트럭이 필요할 것이다. 이것이 보다 우리의 실제 삶에 가까운 비교이다. 자라면서 바퀴가 덜 필요한 게 아니라 더 필요해지는 것이다. 보다 많은 바퀴가 우리를 땅에 단단히 지지해줄 것이지, 더 적은 바퀴는 그렇지 않다. 우리의 실제 삶은 "수직적"이라기 보다는 "수평적"이다. 오늘날의 니폰칸은 많은 바퀴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아주 축복받은 제자들의 조직이 있어 우리의 사무부, 지도부, 유지및관리부를 구성하고 있다. 모든 제자들은 "못 한다"라는 말을 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 제자들, 친구들 그리고 주변의 커뮤니티들은 니폰칸의 바퀴들이다.
***
현 아랍 에미리트 공화국의 아부다비 주재 일본 총영사인 야마가미 하루오 영사는 지난 2년간 덴버의 일본 영사로 재직했다. 덴버 재류중, 야마가미 영사는 니폰칸 본부에서 많은 밤을 세우며 나를 인터뷰하고 "콜로라도의 호랑이-한 아이키도가의 이야기"라는 제목의 책을 저술했다. 이 책은 매우 밀도있으며 28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음은 21장에서 발췌한 것이다. 니폰칸의 초창기, 30여년 전의 니폰칸 초창기의 역사를 그리고 있다. 이 발췌문은 야마모토 하루키라는 필명을 사용하는 야마가미 영사의 허락을 받고 번역되었다.
사실 야마가미 영사의 글을 위한 인터뷰는 니폰칸의 역사적, 독립적인 기록을 남기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는 또한 위에 열거한 요청과 독립 도장을 발전시키기 위한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한 방편이기도 하다.
나는 37년 전 미국에 돈, 연줄, 제자를 데리고 오지 않았다. 나는 아무 것도 없었고, 제로부터 시작했다. 이것은 만일 당신이 아무 것도 없고,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 또한 노력한다면 할 수 있음을 뜻한다. 내가 할 수 있다면.. 당신도 할 수 있다.
21장
니폰칸의 초창기
야마모토 하루키 著
1960년대, "일본 붐"이 미국 동부를 강타했고, 특히 뉴욕과 보스톤이 그러했다. 미국의 학자들과 구도자들은 당시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선(禪)을 비롯한 "동양의" 것들이 신비하고 정신적이며 "도(道)"라고 여기며 흥미를 가졌다. 70년대에 들어서는 이 붐이 홈마 선생이 일본 문화 센터를 열기고 결심한 콜로라도 덴버에까지 미쳤다. 이 새로운 문화 센터의 이름은, 그 목적이 미국 사회에 일본 문화를 소개하는데 있었기에, 그대로 "Japan House Culture Center(일본 일상 문화 센터)"였다.
1976년에는, 일본 일상문화 센터는 일본어, 차도(茶道), 화도(花道). 서도(書道), 일본 요리와 일본 무술인 아이키도를 가르쳤다. 한창 피크일 때에는, 일본어 강좌는 200명 이상의 학생을 보유했고 다른 문화 강좌들은 교실이 꽉 찰 정도였다. 홈마 선생은 여전히 당시의 입회서를 얼마간 갖고 있으며, 나는 그 많은 수를 보고는 놀랐다.
처음에는 10명에서 15명의 일본 문화 강사들이 있었다. 모두들 대부분 일본에서 온 젊은 자원봉사자들이었다. 그중에서 당시 특별한 봉사자 중 한 사람은 시미즈 쿠미코 씨로, 덴버 대학의 교환학생이었다. 시미즈 씨는 공인받은 소게츠류 화도 강사로서 일본 일상문화센터 스태프에 참가하였으며, 후일 콜로라도 대학의 주임 일본어 강사 겸 코디네이터, 덴버 일본인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우연이지만, 시미즈 씨는 또한 현 아이키카이 도주 우에시바 모리테루의 초등학교 동창이기도 하다.)
덴버에서 캐리어를 쌓게 된 또다른 봉사자는 아사노 유미코 씨인데, 구몬수학교실의 소유주이자 교장이다. 유미코 씨는 일본문화센터의 일본어 강사로 일하였고, 센터의 지원을 받아 덴버에서 영주권을 받을 수 있었다.
일본 일상문화센터는 당시 홈마 선생이 덴버 보태니컬 가든 가까이에 빌린 2층 건물에 있었다. 모든 스태프들이 그곳이 살았다. 기숙사 스타일이었다. 낮에는 침실들이 책상과 의자들로 채워져 강의실로 사용되었고, 밤에는 스태프들이 책상과 의자를 옆에 치우고 매트와 이불을 깔아 잠을 잤다. 아침에 매트는 치워져서 방들은 다시 강의실로 탈바꿈했다.
당시 젊은 자원봉사자 대부분은 여성들이었고, 몇몇 일본계 미국인 사회의 리더들은 홈마 선생이 하렘(규방)을 차렸다는 루머를 퍼뜨렸다! 이것은 물론 사실이 아니었고, 루머는 새로운 문화센터의 성장에 큰 장애가 되지 못했다. 당시 덴버의 중견 일본무술 지도자들 중 몇몇은 이 새내기의 등장이 언제나 달가운 것은 아니었고 그의 스타일에 불평하기도 했다. 사범 모임에서 홈마 선생은 사범들로부터 "우리가 진흙탕을 마셔야 한데도, 네가 하는 짓을 하진 않을 거다. 우린 절대 너처럼 일본 문화 수퍼마켓을 차리진 않아!"라는 말을 들었다. 그들의 협박은 마침내 홈마 선생이 당분간 일본계 미국인 커뮤니티를 결연하는 결과를 낳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축복이었다. 덴버에 살면서 일본계 미국인 대신에 미국인 커뮤니티에 집중한 덕분에 홈마 선생의 아이디어는 궁극적으로는 큰 성공임이 드러났다.
문화강좌는 매일 저녁 5시부터 10시까지 진행되었다. 낮에는 봉사자들은 도심지 소재 초등학교나 중학교의 초청을 받아 일본문화 현장 체험을 진행했다. 모든 일본인 강사들이 영어에 능통하진 않았기에, 그들은 영어로 녹음한 카세트를 들고가 나레이터나 꽃꽃이, 서도 및 다른 시연을 위한 배경음악으로 사용했다. 이것은 스태프들이나 관중들 모두에게 좋은 시스템으로 판명되었다. 가라오케(Karaoke)가 아닌, 가라데모(Karademo)는 대히트였다!
피날레는 언제나 홈마 선생에 의한 아이키도 연무였다. 이것은 목표들 중 하나로서, 보다 친근한 일본 문화를 일본무술 아이키도를 선전하는 길잡이로서 사용하는 것이었다. 홈마 선생은 우선 아이키도가였기에, 이러한 문화적 접근은 수고스럽긴 하지만, 성공적이었다. 선생들과 교장들 사이에 입소문이 퍼지면서, 학교로부터의 초청 또한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시연이 하루에 3, 4개의 다른 학교에서 치러진 경우도 있었다.
문화강좌들은 잘 운영되었지만, 금전적으로는 기반이 잡히질 않아, 일본 일상문화센터는 아주 가난했으며, 그들은 돈을 아끼기 위한 많은 창의적인 방편들을 강구했다. 밤에, 스태프들은 꽃 도매시장에 가서 쓰레기통을 뒤져서 다음날 클래스에 쓸만한 꽃들을 골라내기도 했다. 그들은 또한 가까운 들판과 강변을 샅샅이 뒤져서 쓸만한 싱싱한 꽃과 풀을 공짜로 얻기도 했다.
홈마 선생은 이 꽃 도매상 뒤편의 쓰레기통을 뒤지는 심야작전에 대한 많은 즐거운 추억을 갖고 있다.한 남성 자원봉사자는 꽃을 찾다가 거대한 쓰레기통 속에 떨어져버렸다. 동료 스태프들은 쓰레기통 속에서의 소란을 듣고는 그게 그들의 떨어진 동료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몇 분 뒤 그들은 그 소란이 침입자의 추락으로 인해 잠에서 깨어난 거대한 도둑고양이에 의한 것임을 알았다. 고양이는 떨어진 봉사자를 사다리 삼아 그 봉사자의 몸을 발톱으로 헤치며 쓰레기통 밖으로 탈출했다. 그 봉사자는 성공적으로 쓰레기통에서 건져졌지만 일주일간 팔과 얼굴에 고양이 발톱 자국을 달고 다녔다. 그는 일본 문화센터로부터 그의 공적을 인정받아 명예 자색 훈장을 받았다.
또다른 일본인 자원봉사자는 그녀의 꽃꽃이 수업을 위해 재미있는 야생초를 수집하러 나갔다. 그녀가 돌아와 홈마 선생에게 자신의 전리품에 대해 말했다. "선생님, 오늘밤 수업을 위한 최고의 풀을 찾았어요. 재미있는 모양을 하고 있어요. 이게 무슨 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골목길 펜스 주변의 풀숲에서 찾았어요. 이게 뭔지 아세요?" 홈마 선생은 풀을 보자 마자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그건 대마잖아! 아마 어떤 이웃이 풀숲에 한 두 개 심었나보군!" 그녀는 놀라며 풀을 다시 한 번 보고는 즉시 집어던져 버렸다.
홈마 선생은 일본 문화여행을 프로그램에 추가했고 평균 15명의 그룹들을 일년에 두 번 "진짜 일본"을 보여주기 위해 데려갔다. 홈마 선생은 그들을 데리고 일본 전역을 누볐다. 도쿄, 교토, 나라를 비롯하여 그가 한 때 일했던 미사와 공군기지에서 가까운 도와다 호수까지. 홈마 선생은 항상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선생들 중 한 사람으로서 미사와 근처에 살고 있던 스기모토 유키오 씨를 찾아뵈려고 노력했다. 그는 코마키 온천의 소유주였다. 스기모토 씨는 열심인 수집가로서 일본 민속에 대한 수집은 정평이 나있었다. 홈마 선생은 스기모토 씨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고 그러한 기술들을 현재의 니폰칸 도장, 정원, 박물관을 세우는 데에 활용했다. 이러한 투어들 막바지에는, 만일 홈마 선생이 덴버의 콜렉션에 추가할 골동품을 발견할 경우에, 같이 짐을 들어줄 일손은 넘쳐났다!
400명 이상이 홈마 선생과 함께 격년 일본여행에 참가했다.
문화강좌와 시연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은 것처럼, 일본 일상문화 센터는 지역신문을 시작했다. 신문은 매월 1만부 이상 덴버 지역 식당, 학교, 레크리에이션 센터, 커피숍 등에 배부되었다. 1만부를 직접 배부하는 것은 당시 엄청난 일이었지만, 홈마 선생은 미디어의 힘을 이해하고 있었고 모든 형식의 미디어를 일본문화센터를 세우는 데에 활용했다.
배부되기를 기다리는 신문뭉치들.
초창기의 일본 일상문화센터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기쿠치 유타카 씨였는데, 일본 게이오 대학생으로서 덴버 대학에 교환 프로그램으로 온 사람이었다. 기쿠치 시는 이후 일본에 돌아가 니폰칸의 일본 지부장으로 재직중이지만, 그가 덴버에 있던 당시에는 홈마 선생의 오른팔이었다.
체로키 도장 건립 당시. 오른쪽에 있는 이가 기쿠치.
유타카는 일본문화센터의 아이키도 강좌에 초심자 등록을 하면서 홈마 선생과 조우했다. 그날 이후, 그의 덴버에서의 삶은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갔다. 유타카는 그저 좋기만 한게 아니라, 똑똑하고 부지런한 자원봉사자로서 발전도상의 조직에 가치를 따질 수 없는 자원이 되었다. 기쿠치 씨는 홈마 선생의 아이디어와 프로젝트를 받아서 현실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는 신문의 노련한 편집자였고, 모든 일본어 강좌와 번역을 도맡았다. 인생에 있어서 가끔, 꼭 필요한 사람이 꼭 필요한 시간에 나타나는 경우가 있는데, 기쿠치 유타카가 바로 그랬다.
이 즈음 아주 유명한 선사(禪師)가 덴버에 강독을 하러 왔다. 그의 이름은 시마노 에도 선승이었고, 시마노 스님은 뉴욕의 대보살 선당과 뉴욕 선당의 창립자이자 주지였다. 그의 강독 후, 홈마 선생이 시마노 스님의 어깨를 주물러드렸다. 시마노 스님은 홈마 선생에게 조언하길, "자네는 젊지만, 일본 문화를 미국에 소개하는데 놀라운 노력을 기울이고 있군. 나는 이것을 대단하게 여기네. 자네의 일본 일상문화센터의 이름을 생각해보았는데, 이건 너무 "가벼워." 이름을 "니폰칸(日本館)"으로 바꾸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리고 로고의 소 색깔도 보다 평화로운 흰색으로 바꾸는 게 좋을 걸세."
그날 이후, 일본 문화센터는 그 이름을 니폰칸으로 바꾸었고, 소 역시 검은색에서 흰색으로 바뀌었다. 그 소는 사실 소년이 등에 올라탄 것으로 유명한 선화인 십우도(十牛圖) 중 하나이다. 이 그림은 깨달음에 다다르는 옛 가르침 중 6번째를 표현한 것이다. 새로운 명칭과 로고는 그 가치를 잘 발휘하고 있다. 가끔 니폰칸이 일본 육우 회사로 오인받는 것을 빼면 말이다!
홈마 선생이 시마노 스님의 어깨를 주물러 드리고 있다.
새로운 니폰칸은 문화강좌의 발전을 계속하였지만, 홈마 선생의 가장 큰 목적은 아이키도의 발전에 있었다. 1983년 이전, 홈마 관장은 그의 아이키도 강좌를 YMCA로부터 빌린 공간에서 시작하였다. 1983년, 니폰칸은 페데랄 가에 위치한 빌딩 2층을 대여하여 그 첫 도장을 오픈했다. 1년 반 후, 강좌와 보다 넓은 장소의 요구가 늘어나면서, 니폰칸은 도장과 문화강좌를 체로키 스트리트의 새로운 자리로 옮겼다. 체로키 도장이 열렸을 때, 홈마 선생은 매일 100명 이상의 아이키도 수련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아이키도 강좌의 수가 늘어나고는 있었지만, 수련비는 여전히 너무 낮아서 니폰칸 스태프의 삶이 그리 나아지진 않았다. 이전 장에서 자세히 밝혔듯, 스태프들은 강변에서 채집한 풀이나, 홈마 선생이 관리하던 아파트 쓰레기통에서 수거한 정부구호식품들로 근근히 생활하고 있었다. 이들 식품은 정부 보조로 살던 난민들이 버린 것들이었다.
홈마 선생이 덴버 예술 박물관에서 연무하고 있다.
자원봉사자들이 채소밭을 가꾸고 있다.
당시, 수강료는 하루에 콜라 한 캔 값 또는 한 달에 30달러였다. 이런 식으로, 모든 신입, 젊은 학생들은 강좌에 참가할 수 있었다. 목검과 장 수련은 매주 일요일 아침 치즈먼 공원에서 20명 정도 모여서 이뤄졌다. 야외에 있는 것은 수련에 좋은 환경이기도 했지만, 또한 선전에도 좋았다! 수련 후, 모두는 거나한 아침 식사 준비를 하는데 매달렸다.
동시에, 바로 같은 공원에서, 또 한 명의 일본인 무술가가 가라데를 연습하고 있었다. 그는 초대형 샌드백을 나뭇가지에 걸고는 몇 시간이고 수련에 열중했다. 홈마 선생은 이 무술가가 다름 아닌 니노미야 조코, 유명한 가라데 챔피언이자 후일 엔신가라데(圓心空手)의 창설자임을 알았다. 홈마 선생과 니노미야 조코 사범은 오랜 친구가 되었고, 양자 모두 미국만이 아니라 전세계에 무도의 발전을 일구었다. 나는 니노미야 조코 사범에 대한 전기인 '헤이세이의 미야모토 무사시'를 일본에서 출판하였다. (역자주: 니노미야 조코(二宮城光). 1978년 극진회관 주최 전일본대회 우승자. 싸움10단 아시하라 히데유키의 애제자로서, 아시하라가 극진회관을 탈퇴하고 아시하라회관을 창설시 미국지부장 역임. 1988년 아시하라회관을 탈퇴하고 덴버 지역을 중심으로 한 원심회관 창설. 사바키 챌린지(Sabaki Challenge)대회가 유명.)
공원에서의 일요일 아침 수련.
니폰칸이 발전하면서, 새로운 프로젝트나 새로운 발전을 위해서는 언제나 돈이 필요했다. 그들의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서, 홈마 선생과 두 남성 자원봉사자 및 몇몇의 아이키도 수련생은 사무용 빌딩 두 채의 수위 및 관리인으로 야간근무를 했다. 어느 날 저녁, 한 내제자가 일에 동참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들 청소하느라 바쁜 사이, 이 몬타나 출신 내제자는 사무실 전화 하나를 갖고 아주 기~ㄴ 통화를 할 기회를 챙겼다. 나중에 엄청나게 비싼 전화비가 나왔음은 물론이다. 매니저가 나중에 이를 발견하고는 모두를 해고시켜 버렸다! 이것은 니폰칸 스태프들에게 힘든 시기를 제공했지만, 홈마 선생은 고난과 역경에 굴하지 않았다. 홈마 선생은 거친 강물을 보면 다리를 세울 생각을 한다고 한다. 앞길에 큰 산이 버티고 있으면, 그는 터널을 판다. 어떠한 고난이든, 홈마 선생은 무언가를 궁리했다.
이 글의 저자로서, 나는 홈마 선생과 함께 인터뷰를 하면서 보낸 수많은 시간 동안 들은 얘기와 취재를 통해서 그가 니폰칸을 통해 한 일, 학교에서의 시연, 문화 강좌, 아이키도 강좌, 신문, 일본 여행들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힘의 원천은 무엇인가? 그는 문화`정신의 교류라는 그의 꿈을 품고 행동으로 옮겼다. 홈마 선생의 힘은 너무나 대단하고 너무나 존경스럽다.
그의 에너지, 힘, 영감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무엇이 그를 그토록 열심히 일하게 하는 것일까? 난 여전히 확신할 수 없지만, 그가 어려서 이와마 도장에서 살 때 가정부인 기쿠노는 종종 "가쿠가 눈 뜬 채로 자네."라고 말했다고 한다. 내가 아는 한, 창시자 우에시바와의 삶은 홈마 선생에게 발전의 시간이었으나 또한 긴장, 걱정에 트라우마마저 생길 정도의 경험으로 가득 찬 어려운 시기이기도 해서 그에게 좋은 쪽, 나쁜 쪽 모두 영향을 미치기도 한 것이라 생각한다.
홈마 선생은 이와마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며 눈 뜬 채로 잠드는 내제자 생활을 했다. 젊은이로서 그는 아오가 섬에서 일자리를 얻었는데. 육체적으로 힘들고 위험해서 거의 죽을 뻔하기도 했다. 그가 처음으로 미국에 갔을 때, 그는 인간성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슬럼가의 가장 경제적으로 낙후된 지역 중 한 곳의 아파트 관리인으로 일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니폰칸을 시작할 당시 몇몇 일본계 미국인 커뮤니티로부터의 모욕과 차별을 겪는 것까지. 이 모든 경험들을 홈마 선생은 그의 꿈을 이루기 위해 좋은 쪽으로 활용했다. 홈마 선생의 삶에는 그간 많은 어려운 시기가 있었지만, 그는 그것이 니폰칸 문화센터의 초석을 다지는데 쓴 시간이라고 했다. 니폰칸의 초창기는 그가 뭐라 표현하든, 홈마 선생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한 모두에게도 여전히 어려운 시기였다.
미국은 홈마 선생과 자원봉사자 그룹에게 그들의 일본 문화와 유산을 이 나라에 가르치기 위해 그들 자신의 안위를 희생할 자유와 기회를 주었다. 니폰칸에는 이와는 비할 수 없이 가치 있는 것들이 여전히 많다. 홈마 선생의 니폰칸의 꿈은 이제 전세계에 다이아몬드처럼 빛나고 있다. 그의 꿈을 나누고 있는 많은 이들의 도움과 조력과 함께, 그의 세계에 대한 꿈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홈마 가쿠(本間學) 선생의 말은 통역하기 쉽다. 평이하고 꾸밈 없는 진솔한 용어를 사용하고, 추상적이지 않은 직관적인 용어를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끊임 없는 농담으로 수련생 모두를 항상 웃음짓게 만들지만 그 속엔 뼈가 있다.
홈마 선생과
니폰칸(日本館, http://www.nippon-kan.org) 관장 홈마 가쿠 선생의 한국 방문과 그와의 2번째 만남이 전남 순천의 호연도장에서 있었다. 작년의 방문이 아이키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타 행사와 중복된 것이었다면, 이번 한국 방문은 순수하게 윤대현 관장님을 만나기 위한 것이었는데, 마침 관장님의 순천지역 세미나와 겹친 덕분에 지도를 요청한 것을 흔쾌히 받아들이신 것이다. 얼마 전부터 관장님을 미국 덴버로 초청하여 세미나를 여시겠다는 것을 고사하였는데, 이번에 직접 찾으신 것이다. '두 번 찾아왔으니, 한 번은 와야지. 내년 5월에는 꼭 미국을 방문해주시게. 멕시코도 함께 방문할 걸세.'라는 정성에는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세미나의 일정은 토, 일요일의 양일간 총 4타임이지만, 개인 사정상 토요일 하루 2타임만 참가할 수 있었고, 지난 번과 같이 통역과 받기를 담당했다. 선생은 나를 기억해주셨다.
선생은 창시자 우에시바 모리헤이 큰선생과 함께 한 이와마에서의 일들로 운을 땠다.
'큰선생이 틀니를 하였다는 게 믿어지나요? 말년의 큰선생은 자주 역정을 내셔서 높은 선생들은 찾아오지 않았고, 바로 옆집에서 기거하던 사이토 선생을 제외하고는 18세의 저와 19세의 다른 내제자만이 바로 옆을 지켰습니다.' 홈마 선생은 큰선생을 절대 신격화하거나 미화하지 않는다. 큰선생 역시 평범한 노인이었다는 것, 신이 아니라 '신이라 여겨질 정도로 노력한 분'임을 강조한다. 또한 스스로를 미화하지도 않는다. 우에시바 선생이 새벽마다 합기신사에서 '길기만 한' 기도를 하였다는 일, 수련 중에도 너무 긴 강의로 아직 18세 밖에 되지 않았던 홈마 선생은 '또 시작이야? 제발 빨리 끝내고 수련이나 하였으면'하며 속으로 투덜댔지만, 56세가 된 지금은 그때의 선생이 너무나 고맙고 좋은 경험이었다고 하였다.
이와마에서는 준비운동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수련생 대부분이 농부나 공원 등의 육체노동자여서 이미 하루 종일 몸을 사용했기에 따로 워밍업을 할 필요가 없었다고. 준비운동 대신 행했다는 '진혼법(종교와는 별다른 관계가 없는 일본의 전통문화로서 받아들여달라고 전제하셨다)'은 긴 들숨과 날숨으로 보기보다 상당히 어려웠다.
첫 번째 시간은 '사고의 유연성'에 대해서 지도하셨다.
'아이키도는 파괴하는 무도가 아니라, 생산하는 무도입니다. 그렇기에 큰선생께서는 무산합기(武産合氣)라는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내 앞을 벽이 가로막을 때 그것을 부수어 뚫고 가지 않고 둘러서 가는 것, 나아가 이 벽을 새로 지을 집의 한 면으로 활용하는 것. 이것이 아이키도의 사고입니다.'
'합기, 조화라는 말에만 경도되어 마치 춤처럼, 둥글게, 우아하게 움직이는 것에만 신경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도사와 같죠. 상대가 저항하거나 장애가 생기면, '조화해야지'라며 넘어가도록 합니다. 하지만, 사람 사는 것을 보십시요. 모든 게 둥글고 원만하게 되던가요? 그렇지만은 않은 게 당연한 겁니다. 그렇게 되도록 노력은 하지만, 되지 않는 것을 일부러 되는 양하는 것은 안됩니다. 장애가 생기면 오히려 이를 나를 발전시킬 새로운 기회로 받아들이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것, 상대를 느끼며 서로 타협점을 찾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이키도는 무사의 무술입니다. 원래 입신 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상대의 저항에 대하여, 상대가 가고 싶어하는 방향으로 인도하는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 전환이 탄생한 것입니다. 아이키도는 상대를 던지는 게 아니라 인도하는 겁니다.'
'아이키도의 수련은 이런 것입니다. 이와 같은 아이디어를 갖고 몸을 단련하면 내 사고 또한 변하기 시작합니다. 도장에서의 육체적 단련이 일상생활에까지 확대되는 겁니다.'
기술시범 후 수련생들이 꾸물거리자 '서두르세요! 여러분의 시간입니다!'라며 선생은 재촉하셨다. 일부러 돈과 시간을 투자하여 참가하였다면, 그것을 낭비하면 안된다, 최대한 알차게 써야한다는 뜻이셨다. 원래 수련시간 중간에 1시간의 인터벌을 두었지만, 선생은 역시 시간이 아깝다며 쉬는 시간을 15분으로 대폭 줄이고 남는 시간을 더 지도하셨다.
'나의 현역은 앞으로 10년, 나도 이제 다음 세대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큰선생을 직접 접한 사람들의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보다 많은 것을 여러분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두 번째 시간은 무기술과 체술의 연관성에 대해 지도하셨다.
'장을 무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장을 휘두르고 때리려고 하지 마세요. 장은 스스로 움직이고 싶어하는 방향이 있습니다. 장과 친해지세요. 우선 장과 함께 놀아보세요. 다양한 동작을 상상하면서 움직여보세요. 장과 함께 춤을 춰보세요.'
'초상화를 그릴 때 레이아웃을 잡은 후에 세밀한 부분을 그려가는 것처럼, 우선 장과 친해진 다음에 세세한 부분을 교정하는 겁니다. 초심자들에게 처음부터 세세한 부분을 지적하면서 엄하게 하면, 더 이상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겁니다. 도화지에 크래용으로 마음껏 그림그리는 아이에게 옆에서 이런저런 지적을 하면 그 아이가 더 이상 그림그리고 싶어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겁니다.'
'일본에선 전통적으로 장은 포졸들이 사용하는 무기입니다. 지금도 기동대에서는 장을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장은 죽이는 무기가 아니라, 벌주는 무기입니다. 최소한의 상처로 최대한의 대미지를 주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검을 사용하는 무사의 룰이기도 합니다. 무사는 기본적으로 군인, 적을 죽이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사람을 죽이는 것은 역시 괴로운 일입니다. 그렇기에 최소한의 상처를 주면서 최대한의 대미지를 주는 방법을 연구개발하면서 기술의 레벨이 높아진 것입니다.'
선생의 간합은 '나와 상대의 앞발 엄지 사이의 거리가 내가 기지개를 키면서 엎드렸을 때 닿는 거리'였는데, 받기인 나를 마치 술래잡기하듯 이리저리 도망치다 멈추게 하신 후에는, 당신의 몸을 엎드리며 그 거리를 쟀는데, 몇 번을 해봐도 더도 덜도 아닌 똑같은 거리에 맞춰져 있었다. 결국 나는 언제나 선생의 거리 속에 들어가 있는 셈이었다.
이와마 스타일의 목검 끝이 여타 일반 목검과 달리 뾰족하지 않고 뭉툭한 이유는 그것이 '곡괭이 자루'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1945년부터 1949년까지 GHQ(미국 점령군)의 맥아더 장군은 일본내 무술 수련을 금지시켰을 때, 목검을 사용하는 것은 헌병들의 시비를 불러올 수 있기에 곡괭이 자루를 그대로 목검 대용으로 사용한 것이 이와마류 목검의 유래라고 한다.
장의 길이 역시 이와마의 것과 본부도장의 것은 서로 다르다. 일반적인 본부도장 스타일의 장이 겨드랑이 높이의 길이인데 반해, 이와마의 것은 겨드랑이 높이에 주먹 하나를 더한 길이라고 한다. 이것은 이와마의 장이 '갈퀴 자루'를 그대로 쓴 것이라 갈퀴를 끼우는 부분이 주먹 하나 정도의 폭이기에 그런 것이라고. 모든 것에는 유래가 있고, 국가, 지형, 환경, 문화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설명해주셨다.
홈마 선생은 '검 대 장'의 상황에서의 기술공방이 다시 '장 대 장''검 대 검''체술'로 변화하는 것을 보여주셨다. 또한 다시1대 1에서의 공방이 1대 2로, 근거리-일반-먼거리 간합에 따른 변화 이 모두가 하나의 통일된 움직임 속에서 이루어짐을보여주셨다. 이것이 홈마 선생이 특화한 부분인데, 선생의 무기술은 故 사이토 모리히로 선생의 이와마 스타일을 바탕으로 새로이체계화한 것이다. 사이토 선생의 무기술을 '흠결이 있다'고 하는 지적도 있지만, 체술-검술-장술의 모든 움직임이 하나의'통일성'을 이루는 시스템을 만들어낸 것은 개인적으로 대단한 업적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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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AHAN(Aikido Humanitarian Active Network)이란 아이키도를 통한 인도주의 봉사단체의 수장이시기도 하다. 아이키도의 철학을 도장 안에서만이 아니라 전세계를 대상으로 전파하고, 또한 각 도장들이 소속 커뮤니티에 봉사하는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돕기도 한다. AHAN의 활동지역은 미국,일본만이 아니라 멕시코, 터키, 아제르바이잔, 터키, 방글라데시, 모로코, 이탈리아, 브라질, 중앙아메리카, 체코슬로바키아 등 전세계를 망라한다.
선생께 곧 1년간 동티모르에 파견나가게 된다고 말씀드리자, '위험한 곳일 텐데. 그래도 좋은 경험이 될 걸세. 현지에 가서 필요한 것이 있으면 메일을 보내게나. 돈, 도복, 매트리스 등 뭐든지 보내주도록 하지.'라는 생각지도 못한 지원을 약속해주셨다. '미국에서의 5천달러는 별 거 아닐 수 있지만, 그 돈이 다른 나라에서는 한 사람의 평생교육비가 될 수도 있지. 같은 돈이라면 더 뜻 깊은 곳에 쓰는 게 좋아.'
단 두 번의 만남이지만, 선생은 배울 게 많은 분이었다. 무술의 실력과 그 무술의 철학을 어떻게 사회에 환원하는가, 계파에 관계 없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새로운 세대를 위한 후진을 양성하는가에 대해서 모범답안을 몸소 보여주시는 분. 이러한 분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또한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신 선생님과 척박한 땅을 개척하는 변함 없는 정열을 불태우는 석영민 호연도장장과 그 부인께도 언제나 고마울 따름이다.
마지막으로 곧 1년간 한국을 떠날 것임에도 불구하고 3주 연속 주말외박을 감행한 남편을 이해해주는 아내에게 가장 큰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1. 동티모르 파견일이 1주일 늦춰졌다. 11월 23일 출국한다고 언론보도까지 난 상황에서 이게 왠일이냐, 난 어제 대장님을 비롯한 모든 직원들에게 작별인사까지 했단 말이다! '완전히 새됐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말인가?
2. 서울경찰특공대에서 P7권총 사격연습을 했다. 이건 또 왠일이냐. 정중앙에 다들어간다! 지금까지 사격하면서 이런 적 처음이다. 특공사격, 서서쏴, 무릎쏴, 이동쏴, 한손(오른손, 왼손) 사격, 다 쑥쑥 들어간다. 물론 특공대원만큼의 전문사격은 아닌 기초적인 사격이지만 스스로가 신기할 정도. 그 원인은 무엇일까?
1) 좋은 총이라서. 2) 어쩌다가 그냥 3) 좋은 교관을 만나서 4) 스가와라 선생의 세미나 덕
1)-4)까지 모든 보기가 다 맞겠지만, 3)과 4)에 특히 마음이 간다.
지난 번 사격훈련 때도 좋은 교관 덕분에 사격이 향상되었고, 이번 사격훈련 교관도 약간의 자세교정과 조언으로 명중률이 순식간에 월등히 좋아졌다.
스가와라 선생 덕이라는 건 홍두깨 같은 얘기지만, 선생의 세미나 때 가장 신경쓴 것이 '자세의 안정'과 '어떻게 서느냐'였다. 움직임의 기본이치는 어떠한 종목이든 서로 통하는 바가 있다. 그 결과가 이렇게 단숨에 나타난다는 것이 놀랍다. 역시 좋은 선생은 중요하다.
3. 1주일 파견이 늦춰져서 기쁜 점은 홈마 가쿠 선생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
스가와라 선생이 귀국하시자마자 11월 22일에 홈마 가쿠 선생이 작년에 이어 다시 방한한다. 아마도 이번에는 관장님의 11월 25일 순천세미나에 동행하시지 않을까 하는데, 이번에도 통역을 맡아야 할 듯.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이리 기쁜 일인 것인지 아이키도를 하기 전에는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