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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시바 미츠테루 본부도장장(4대)


야스노 마사토시 7단


엔도 세이시로 8단


고바야시 야스오 8단


타다 히로시 9단




기타 제49회 전일본연무대회 영상은 아래 링크로:
http://www.youtube.com/results?search_query=49th+All+Japan+Aikido+Demonstration&aq=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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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손국희

    좋은자료를 보기좋게 모아 두셔서 편하게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2011/06/04 13:27
  2. 박주빈

    즐감하고 배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2011/06/08 13:01
  3. 영웅송산

    항상 좋은자료 감사합니다. ^^

    2011/10/07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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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daum.net/ai1004/15973713 ←사진을 볼 수 있는 '까망천사'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oskorea/16500177 ← 행사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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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묘우

    우와~~ 사진 좋네요!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우케 받고 계신 분이 누군진 모르겠지만, 선생님의 우케를 받아낸다는 것 자체가 보통일이 아니라는 정도는 압니다...
    선생님 표정에 짙은 고뇌와 고독감이 보이는 듯 하네요.
    젊은 제자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다같이 분발해야 할 것 같네요.

    2010/08/23 00:01
Trial & Error/20092009/08/22 00:16
http://www.nippon-kan.org/senseis_articles/09/the_beginning/the_beginning.html
You can read the original article in English through the link above.

- 원문은 위 링크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홈마 선생의 전기, 꼭 사보고 싶군요.
- 이 번역문을 꼭 제가 바라는 누군가께서 읽어보시고 조금이나마 위안이 된다면 너무나 기쁘겠습니다.


니폰칸의 초창기

서문

니폰칸 창립자

홈마 가쿠(本間學)


며칠 전 나는 50대를 지나 새로운 갑자로 들어섰다.; 최소한 일본식의 생일계산상으로는. 내가 더 이상 생일 축하를 큰 파티나 많은 즐거운 일들로 꾸미지 않기로 결심한 것은 거의 20년 전의 일이다. 지난 몇 년 간 나는 크리스마스나 신년 축하자리에 참석하는 것조차도 그만두었다. 대부분의 내 제자들은 이를 이해하고 있다. 특히 나를 오랬동안 알아온 이들은. 나는 이를 내 삶에서 경험한 철학의 반영으로서 행하고 있으며, 이것이 내게 편하다.

내가 미국에서 '선생'으로서 생활한지는 37년이 되었다. 제자들이 생일 파티를 아주 크게 벌여서 선물이나 현금`수표가 들어간 축하카드를 뜯는 데만 30분 이상 걸렸던 적도 있다. 내 스스로 그러한 파티나 선물을 바랐던 적도 있다. '선생'으로서의 삶에 있어서 이는 그리 특이한 일이 아니었다.

하루는, 특히나 거창했던 파티 다음에 찾아온 엄청난 숙취 속에 깨어났는데, 나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건 미친 짓이야.",나는 생각했다. "이건 내 생일을 축하하는 온당한 방법이 아니야." 다음 해에 나는 제자들에게 파티 대신에 시에서 주관하는 자선 프로젝트에 함께 참가할 것을 권했다. 이 전통은 여전히 존중되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지금의 AHAN(아이키도 인도주의 행동 네트워크, the Aikido Humanitarian Active Network)의 시발점이었다.

또한 나는 AHAN으로서 여행하면서 세계의 미개발 국가들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를 깨달았다. 순전히 생존을 위해 살거나 전쟁의 참상, 빈곤, 질병 등을 목격한 사람들을 만나고 알게 되었으며, 이는 내 삶과 가치관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

니폰칸은 지난 37년간 내 꿈 또는 예상을 넘어서 발전했다. 오늘날 AHAN 니폰칸은 "봉사하는 무도(Engaged Budoism)"을 기치로 내걸고 세계 곳곳의 친구들과 함께 글로벌한 수준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우리는 언제나 아이키도 도장이며 우리의 조직도 아이키도에 맞춰져 있었지만, 최근 우리의 포커스는 아이키도 수련을 넘어선 많은 프로그램들을 포함하는 것에까지 확장되었다. 기본적 생계와 보살핌을 더욱 필요로 하는 어린이들을 돕는 것이다.

니폰칸의 모든 역사를 아는 제자들이 아주 드물다. 많은 제자들이 니폰칸이  현재의 위치로 옮기기 전이나 도장조차 없던 시절에 니폰칸이 어떠했는지 알지 못한다.

최근 제자들로부터 많은 편지를 받았는데, 그 대부분은 어떻게 독립도장으로서 성공할 수 있는지 또는 우리가 지금 하고 있듯이 도장과 문화센터를 함께 운영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니폰칸의 역사나 그 성공과 실패의 핵심을 가르치는 것은 쉽지 않다. 수년 간의 노력이 축적되어 온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줄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은,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향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나아가는 것이다. 하루 하루, 조금씩 조금씩, 한 걸음 한 걸음. 마법의 해답 따위는 없다.

아마도 니폰칸이 현재 가고 있는 길이 "산꼭대기에서 명상중에 불현듯 떠올랐다"고 말한다면 보다 신비롭기야 하겠지만, 사실 이것은 "엄청난 숙취 다음날 아침"에 떠오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뜻하는 바는, 누구라도, 나처럼 젊은 시절 "노는 데" 잔뜩 시간을 보낸 사람조차도 이러한 동일한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목표나 꿈이 없이는 공허하다. 이들은 우리의 삶에 의미와 희망을 부여한다. 그러나 단지 목표나 꿈을 갖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저 하늘만 바라보면서 깨달음을 구하거나 꿈이 이루어지길 바랄 수는 없다. 때로 목표가 희미해지거나, 샛길로 빠지기도 한다. 이것은 흔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모든 목표에는 노력이 깃들어야 하는 것이지, 저 혼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내딛는 한 걸음, 타협의 한 턴, 모든 전환(텐칸)들이 목표를 향해 당신을 한 걸음 다가가게 만든다. 내딛은 걸음은 결코 허비된 걸음이거나 뒷걸음이 아니며, 모든 걸음은 앞으로 향해야 한다. 제자리에 머물지 말고, 만일 목표나 꿈이 변한다해서 걱정하지 말고, 그저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면 기회가 스스로를 드러낼 것이다.

2006년에 나는 니폰칸 웹사이트에 "땅을 굳게 내딛으며(Walking Firmly on the Ground)"라는 글을 썼다. 그것은 한 일본의 카리스마 넘치는 가라데 마스터가 한 소년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과 그의 구도(求道)에 대한 것이었다. 간단히, 그 소년은 우선 세발 자전거, 다음으로 두발 자전거, 마침내 외발 자전거를 마스터했다. 외발 자전거는 정상에 오름을 뜻하고 챔피언이 되었음을 은유한 것이다. 그 글에서 내가 썼듯이, 난 이 이야기에는 또 한 챕터가 더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접근은 마치 별을 따려고 대나무 장대질을 하는 것과 같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는 모두 인간으로서 땅에 맨발을 내딛으며 삶을 시작한다. 자라면서 우리는 우리의 소유물을 싣기 위한 두발 수레가 필요할 거고, 다음으로 세발 수레, 또 다음으로 네발 리어카, 자동차 또는 트럭이 필요할 것이다. 이것이 보다 우리의 실제 삶에 가까운 비교이다. 자라면서 바퀴가 덜 필요한 게 아니라 더 필요해지는 것이다. 보다 많은 바퀴가 우리를 땅에 단단히 지지해줄 것이지, 더 적은 바퀴는 그렇지 않다. 우리의 실제 삶은 "수직적"이라기 보다는 "수평적"이다. 오늘날의 니폰칸은 많은 바퀴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아주 축복받은 제자들의 조직이 있어 우리의 사무부, 지도부, 유지및관리부를 구성하고 있다. 모든 제자들은 "못 한다"라는 말을 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 제자들, 친구들 그리고 주변의 커뮤니티들은 니폰칸의 바퀴들이다.

***

현 아랍 에미리트 공화국의 아부다비 주재 일본 총영사인 야마가미 하루오 영사는 지난 2년간 덴버의 일본 영사로 재직했다. 덴버 재류중, 야마가미 영사는 니폰칸 본부에서 많은 밤을 세우며 나를 인터뷰하고 "콜로라도의 호랑이-한 아이키도가의 이야기"라는 제목의 책을 저술했다. 이 책은 매우 밀도있으며 28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음은 21장에서 발췌한 것이다. 니폰칸의 초창기, 30여년 전의 니폰칸 초창기의 역사를 그리고 있다. 이 발췌문은 야마모토 하루키라는 필명을 사용하는 야마가미 영사의 허락을 받고 번역되었다.

사실 야마가미 영사의 글을 위한 인터뷰는 니폰칸의 역사적, 독립적인 기록을 남기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는 또한 위에 열거한 요청과 독립 도장을 발전시키기 위한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한 방편이기도 하다.

나는 37년 전 미국에 돈, 연줄, 제자를 데리고 오지 않았다. 나는 아무 것도 없었고, 제로부터 시작했다. 이것은 만일 당신이 아무 것도 없고,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 또한 노력한다면 할 수 있음을 뜻한다. 내가 할 수 있다면.. 당신도 할 수 있다.


21장
니폰칸의 초창기

야마모토 하루키 著

1960년대, "일본 붐"이 미국 동부를 강타했고, 특히 뉴욕과 보스톤이 그러했다. 미국의 학자들과 구도자들은 당시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선(禪)을 비롯한 "동양의" 것들이 신비하고 정신적이며 "도(道)"라고 여기며 흥미를 가졌다. 70년대에 들어서는 이 붐이 홈마 선생이 일본 문화 센터를 열기고 결심한 콜로라도 덴버에까지 미쳤다. 이 새로운 문화 센터의 이름은, 그 목적이 미국 사회에 일본 문화를 소개하는데 있었기에, 그대로 "Japan House Culture Center(일본 일상 문화 센터)"였다.

1976년에는, 일본 일상문화 센터는 일본어, 차도(茶道), 화도(花道). 서도(書道), 일본 요리와 일본 무술인 아이키도를 가르쳤다. 한창 피크일 때에는, 일본어 강좌는 200명 이상의 학생을 보유했고 다른 문화 강좌들은 교실이 꽉 찰 정도였다. 홈마 선생은 여전히 당시의 입회서를 얼마간 갖고 있으며, 나는 그 많은 수를 보고는 놀랐다.

처음에는 10명에서 15명의 일본 문화 강사들이 있었다. 모두들 대부분 일본에서 온 젊은 자원봉사자들이었다. 그중에서 당시 특별한 봉사자 중 한 사람은 시미즈 쿠미코 씨로, 덴버 대학의 교환학생이었다. 시미즈 씨는 공인받은 소게츠류 화도 강사로서 일본 일상문화센터 스태프에 참가하였으며, 후일 콜로라도 대학의 주임 일본어 강사 겸 코디네이터, 덴버 일본인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우연이지만, 시미즈 씨는 또한 현 아이키카이 도주 우에시바 모리테루의 초등학교 동창이기도 하다.)

덴버에서 캐리어를 쌓게 된 또다른 봉사자는 아사노 유미코 씨인데, 구몬수학교실의 소유주이자 교장이다. 유미코 씨는 일본문화센터의 일본어 강사로 일하였고, 센터의 지원을 받아 덴버에서 영주권을 받을 수 있었다.

일본 일상문화센터는 당시 홈마 선생이 덴버 보태니컬 가든 가까이에 빌린 2층 건물에 있었다. 모든 스태프들이 그곳이 살았다. 기숙사 스타일이었다. 낮에는 침실들이 책상과 의자들로 채워져 강의실로 사용되었고, 밤에는 스태프들이 책상과 의자를 옆에 치우고 매트와 이불을 깔아 잠을 잤다. 아침에 매트는 치워져서 방들은 다시 강의실로 탈바꿈했다.

당시 젊은 자원봉사자 대부분은 여성들이었고, 몇몇 일본계 미국인 사회의 리더들은 홈마 선생이 하렘(규방)을 차렸다는 루머를 퍼뜨렸다! 이것은 물론 사실이 아니었고, 루머는 새로운 문화센터의 성장에 큰 장애가 되지 못했다. 당시 덴버의 중견 일본무술 지도자들 중 몇몇은 이 새내기의 등장이 언제나 달가운 것은 아니었고 그의 스타일에 불평하기도 했다. 사범 모임에서 홈마 선생은 사범들로부터 "우리가 진흙탕을 마셔야 한데도, 네가 하는 짓을 하진 않을 거다. 우린 절대 너처럼 일본 문화 수퍼마켓을 차리진 않아!"라는 말을 들었다. 그들의 협박은 마침내 홈마 선생이 당분간 일본계 미국인 커뮤니티를 결연하는 결과를 낳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축복이었다. 덴버에 살면서 일본계 미국인 대신에 미국인 커뮤니티에 집중한 덕분에 홈마 선생의 아이디어는 궁극적으로는 큰 성공임이 드러났다.

문화강좌는 매일 저녁 5시부터 10시까지 진행되었다. 낮에는 봉사자들은 도심지 소재 초등학교나 중학교의 초청을 받아 일본문화 현장 체험을 진행했다. 모든 일본인 강사들이 영어에 능통하진 않았기에, 그들은 영어로 녹음한 카세트를 들고가 나레이터나 꽃꽃이, 서도 및 다른 시연을 위한 배경음악으로 사용했다. 이것은 스태프들이나 관중들 모두에게 좋은 시스템으로 판명되었다. 가라오케(Karaoke)가 아닌, 가라데모(Karademo)는 대히트였다!

피날레는 언제나 홈마 선생에 의한 아이키도 연무였다. 이것은 목표들 중 하나로서, 보다 친근한 일본 문화를 일본무술 아이키도를 선전하는 길잡이로서 사용하는 것이었다. 홈마 선생은 우선 아이키도가였기에, 이러한 문화적 접근은 수고스럽긴 하지만, 성공적이었다. 선생들과 교장들 사이에 입소문이 퍼지면서, 학교로부터의 초청 또한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시연이 하루에 3, 4개의 다른 학교에서 치러진 경우도 있었다.

문화강좌들은 잘 운영되었지만, 금전적으로는 기반이 잡히질 않아, 일본 일상문화센터는 아주 가난했으며, 그들은 돈을 아끼기 위한 많은 창의적인 방편들을 강구했다. 밤에, 스태프들은 꽃 도매시장에 가서 쓰레기통을 뒤져서 다음날 클래스에 쓸만한 꽃들을 골라내기도 했다. 그들은 또한 가까운 들판과 강변을 샅샅이 뒤져서 쓸만한 싱싱한 꽃과 풀을 공짜로 얻기도 했다.

홈마 선생은 이 꽃 도매상 뒤편의  쓰레기통을 뒤지는 심야작전에 대한 많은 즐거운 추억을 갖고 있다.한 남성 자원봉사자는 꽃을 찾다가 거대한 쓰레기통 속에 떨어져버렸다. 동료 스태프들은 쓰레기통 속에서의 소란을 듣고는 그게 그들의 떨어진 동료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몇 분 뒤 그들은 그 소란이 침입자의 추락으로 인해 잠에서 깨어난 거대한 도둑고양이에 의한 것임을 알았다. 고양이는 떨어진 봉사자를 사다리 삼아 그 봉사자의 몸을 발톱으로 헤치며 쓰레기통 밖으로 탈출했다. 그 봉사자는 성공적으로 쓰레기통에서 건져졌지만 일주일간 팔과 얼굴에 고양이 발톱 자국을 달고 다녔다. 그는 일본 문화센터로부터 그의 공적을 인정받아 명예 자색 훈장을 받았다.

또다른 일본인 자원봉사자는 그녀의 꽃꽃이 수업을 위해 재미있는 야생초를 수집하러 나갔다. 그녀가 돌아와 홈마 선생에게 자신의 전리품에 대해 말했다. "선생님, 오늘밤 수업을 위한 최고의 풀을 찾았어요. 재미있는 모양을 하고 있어요. 이게 무슨 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골목길 펜스 주변의 풀숲에서 찾았어요. 이게 뭔지 아세요?" 홈마 선생은 풀을 보자 마자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그건 대마잖아! 아마 어떤 이웃이 풀숲에 한 두 개 심었나보군!" 그녀는 놀라며 풀을 다시 한 번 보고는 즉시 집어던져 버렸다.

홈마 선생은 일본 문화여행을 프로그램에 추가했고 평균 15명의 그룹들을 일년에 두 번 "진짜 일본"을 보여주기 위해 데려갔다. 홈마 선생은 그들을 데리고 일본 전역을 누볐다. 도쿄, 교토, 나라를 비롯하여 그가 한 때 일했던 미사와 공군기지에서 가까운 도와다 호수까지. 홈마 선생은 항상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선생들 중 한 사람으로서 미사와 근처에 살고 있던 스기모토 유키오 씨를 찾아뵈려고 노력했다. 그는 코마키 온천의 소유주였다. 스기모토 씨는 열심인 수집가로서 일본 민속에 대한 수집은 정평이 나있었다. 홈마 선생은 스기모토 씨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고 그러한 기술들을 현재의 니폰칸 도장, 정원, 박물관을 세우는 데에 활용했다. 이러한 투어들 막바지에는, 만일 홈마 선생이 덴버의 콜렉션에 추가할 골동품을 발견할 경우에, 같이 짐을 들어줄 일손은 넘쳐났다!

Nippon Kan

400명 이상이 홈마 선생과 함께 격년 일본여행에 참가했다.

문화강좌와 시연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은 것처럼, 일본 일상문화 센터는 지역신문을 시작했다. 신문은 매월 1만부 이상 덴버 지역 식당, 학교, 레크리에이션 센터, 커피숍 등에 배부되었다. 1만부를 직접 배부하는 것은 당시 엄청난 일이었지만, 홈마 선생은 미디어의 힘을 이해하고 있었고 모든 형식의 미디어를 일본문화센터를 세우는 데에 활용했다.

Nippon Kan

배부되기를 기다리는 신문뭉치들.

초창기의 일본 일상문화센터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기쿠치 유타카 씨였는데, 일본 게이오 대학생으로서 덴버 대학에 교환 프로그램으로 온 사람이었다. 기쿠치 시는 이후 일본에 돌아가 니폰칸의 일본 지부장으로 재직중이지만, 그가 덴버에 있던 당시에는 홈마 선생의 오른팔이었다.

Nippon Kan

체로키 도장 건립 당시. 오른쪽에 있는 이가 기쿠치.

유타카는 일본문화센터의 아이키도 강좌에 초심자 등록을 하면서 홈마 선생과 조우했다. 그날 이후, 그의 덴버에서의 삶은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갔다. 유타카는 그저 좋기만 한게 아니라, 똑똑하고 부지런한 자원봉사자로서 발전도상의 조직에 가치를 따질 수 없는 자원이 되었다. 기쿠치 씨는 홈마 선생의 아이디어와 프로젝트를 받아서 현실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는 신문의 노련한 편집자였고, 모든 일본어 강좌와 번역을 도맡았다. 인생에 있어서 가끔, 꼭 필요한 사람이 꼭 필요한 시간에 나타나는 경우가 있는데, 기쿠치 유타카가 바로 그랬다.

이 즈음 아주 유명한 선사(禪師)가 덴버에 강독을 하러 왔다. 그의 이름은 시마노 에도 선승이었고, 시마노 스님은 뉴욕의 대보살 선당과 뉴욕 선당의 창립자이자 주지였다. 그의 강독 후, 홈마 선생이 시마노 스님의 어깨를 주물러드렸다. 시마노 스님은 홈마 선생에게 조언하길, "자네는 젊지만, 일본 문화를 미국에 소개하는데 놀라운 노력을 기울이고 있군. 나는 이것을 대단하게 여기네. 자네의 일본 일상문화센터의 이름을 생각해보았는데, 이건 너무 "가벼워." 이름을 "니폰칸(日本館)"으로 바꾸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리고 로고의 소 색깔도 보다 평화로운 흰색으로 바꾸는 게 좋을 걸세."

그날 이후, 일본 문화센터는 그 이름을 니폰칸으로 바꾸었고, 소 역시 검은색에서 흰색으로 바뀌었다. 그 소는 사실 소년이 등에 올라탄 것으로 유명한 선화인 십우도(十牛圖) 중 하나이다. 이 그림은 깨달음에 다다르는 옛 가르침 중 6번째를 표현한 것이다. 새로운 명칭과 로고는 그 가치를 잘 발휘하고 있다. 가끔 니폰칸이 일본 육우 회사로 오인받는 것을 빼면 말이다!

Nippon Kan 
홈마 선생이 시마노 스님의 어깨를 주물러 드리고 있다.

새로운 니폰칸은 문화강좌의 발전을 계속하였지만, 홈마 선생의 가장 큰 목적은 아이키도의 발전에 있었다. 1983년 이전, 홈마 관장은 그의 아이키도 강좌를 YMCA로부터 빌린 공간에서 시작하였다. 1983년, 니폰칸은 페데랄 가에 위치한 빌딩 2층을 대여하여 그 첫 도장을 오픈했다. 1년 반 후, 강좌와 보다 넓은 장소의 요구가 늘어나면서, 니폰칸은 도장과 문화강좌를 체로키  스트리트의 새로운 자리로 옮겼다. 체로키 도장이 열렸을 때, 홈마 선생은 매일 100명 이상의 아이키도 수련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아이키도 강좌의 수가 늘어나고는 있었지만, 수련비는 여전히 너무 낮아서 니폰칸 스태프의 삶이 그리 나아지진 않았다. 이전 장에서 자세히 밝혔듯, 스태프들은 강변에서 채집한 풀이나, 홈마 선생이 관리하던 아파트 쓰레기통에서 수거한 정부구호식품들로 근근히 생활하고 있었다. 이들 식품은 정부 보조로 살던 난민들이 버린 것들이었다.

Nippon Kan

홈마 선생이 덴버 예술 박물관에서 연무하고 있다.


Nippon Kan 
자원봉사자들이 채소밭을 가꾸고 있다.

당시, 수강료는 하루에 콜라 한 캔 값 또는 한 달에 30달러였다. 이런 식으로, 모든 신입, 젊은 학생들은 강좌에 참가할 수 있었다. 목검과 장 수련은 매주 일요일 아침 치즈먼 공원에서 20명 정도 모여서 이뤄졌다. 야외에 있는 것은 수련에 좋은 환경이기도 했지만, 또한 선전에도 좋았다! 수련 후, 모두는 거나한 아침 식사 준비를 하는데 매달렸다.

동시에, 바로 같은 공원에서, 또 한 명의 일본인 무술가가 가라데를 연습하고 있었다. 그는 초대형 샌드백을 나뭇가지에 걸고는 몇 시간이고 수련에 열중했다. 홈마 선생은 이 무술가가 다름 아닌 니노미야 조코, 유명한 가라데 챔피언이자 후일 엔신가라데(圓心空手)의 창설자임을 알았다. 홈마 선생과 니노미야 조코 사범은 오랜 친구가 되었고, 양자 모두 미국만이 아니라 전세계에 무도의 발전을 일구었다. 나는 니노미야 조코 사범에 대한 전기인 '헤이세이의 미야모토 무사시'를 일본에서 출판하였다. (역자주: 니노미야 조코(二宮城光). 1978년 극진회관 주최 전일본대회 우승자. 싸움10단 아시하라 히데유키의 애제자로서, 아시하라가 극진회관을 탈퇴하고 아시하라회관을 창설시 미국지부장 역임. 1988년 아시하라회관을 탈퇴하고 덴버 지역을 중심으로 한 원심회관 창설. 사바키 챌린지(Sabaki Challenge)대회가 유명.)
Nippon Kan 
공원에서의 일요일 아침 수련.

니폰칸이 발전하면서, 새로운 프로젝트나 새로운 발전을 위해서는 언제나 돈이 필요했다. 그들의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서, 홈마 선생과 두 남성 자원봉사자 및 몇몇의 아이키도 수련생은 사무용 빌딩 두 채의 수위 및 관리인으로 야간근무를 했다. 어느 날 저녁, 한 내제자가 일에 동참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들 청소하느라 바쁜 사이, 이 몬타나 출신 내제자는 사무실 전화 하나를 갖고 아주 기~ㄴ 통화를 할 기회를 챙겼다. 나중에 엄청나게 비싼 전화비가 나왔음은 물론이다. 매니저가 나중에 이를 발견하고는 모두를 해고시켜 버렸다! 이것은 니폰칸 스태프들에게 힘든 시기를 제공했지만, 홈마 선생은 고난과 역경에 굴하지 않았다. 홈마 선생은 거친 강물을 보면 다리를 세울 생각을 한다고 한다. 앞길에 큰 산이 버티고 있으면, 그는 터널을 판다. 어떠한 고난이든, 홈마 선생은 무언가를 궁리했다.

이 글의 저자로서, 나는 홈마 선생과 함께 인터뷰를 하면서 보낸  수많은 시간 동안 들은 얘기와 취재를 통해서 그가 니폰칸을 통해 한 일, 학교에서의 시연, 문화 강좌, 아이키도 강좌, 신문, 일본 여행들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힘의 원천은 무엇인가? 그는 문화`정신의 교류라는 그의 꿈을 품고 행동으로 옮겼다. 홈마 선생의 힘은 너무나 대단하고 너무나 존경스럽다.

그의 에너지, 힘, 영감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무엇이 그를 그토록 열심히 일하게 하는 것일까? 난 여전히 확신할 수 없지만, 그가 어려서 이와마 도장에서 살 때 가정부인 기쿠노는 종종 "가쿠가 눈 뜬 채로 자네."라고 말했다고 한다. 내가 아는 한, 창시자 우에시바와의 삶은 홈마 선생에게 발전의 시간이었으나 또한 긴장, 걱정에 트라우마마저 생길 정도의 경험으로 가득 찬 어려운 시기이기도 해서 그에게 좋은 쪽, 나쁜 쪽 모두 영향을 미치기도 한 것이라 생각한다.

홈마 선생은 이와마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며 눈 뜬 채로 잠드는 내제자 생활을 했다. 젊은이로서 그는 아오가 섬에서 일자리를 얻었는데. 육체적으로 힘들고 위험해서 거의 죽을 뻔하기도 했다. 그가 처음으로 미국에 갔을 때, 그는 인간성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슬럼가의 가장 경제적으로 낙후된 지역 중 한 곳의 아파트 관리인으로 일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니폰칸을 시작할 당시 몇몇 일본계 미국인 커뮤니티로부터의 모욕과 차별을 겪는 것까지. 이 모든 경험들을 홈마 선생은 그의 꿈을 이루기 위해 좋은 쪽으로 활용했다. 홈마 선생의 삶에는 그간 많은 어려운 시기가 있었지만, 그는 그것이 니폰칸 문화센터의 초석을 다지는데 쓴 시간이라고 했다. 니폰칸의 초창기는 그가 뭐라 표현하든, 홈마 선생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한 모두에게도 여전히 어려운 시기였다.
미국은 홈마 선생과 자원봉사자 그룹에게 그들의 일본 문화와 유산을 이 나라에 가르치기 위해 그들 자신의 안위를 희생할 자유와 기회를 주었다. 니폰칸에는 이와는 비할 수 없이 가치 있는 것들이 여전히 많다. 홈마 선생의 니폰칸의 꿈은 이제 전세계에 다이아몬드처럼 빛나고 있다. 그의 꿈을 나누고 있는 많은 이들의 도움과 조력과 함께, 그의 세계에 대한 꿈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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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
    강한 자극을 받았습니다.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고,
    힘드시더라도 화이팅입니다!! ^^

    2009/08/24 11:42
Trial & Error/20092009/07/22 19:39






광주 운암도장장께서 찍어주셨습니다.
(All pictures shown by courtesy of Gwangju Woonam Dojocho.)
운암도장 카페(Gwangju Woonam Dojo) -> http://cafe.daum.net/woonamdoj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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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he original message was posted onto the article below, so it's moved to the seemmingly right spot.-Aikidokr)

    chongyee 2009/07/26 13:02

    hi~ i'm student in Gwangju, came all the way from Malaysia. I train Aikido in Malaysia for years, and have been looking for aikido dojo in Gwangju. It seems I missed the recent seminar in Gwangju.. I'm interested in training Aikido. Do you think you can show me the location of Gwangju Woonam dojo?

    Thank you!

    Hang,Chong-Yee
    Malaysia
    fzongyu@gmail.com

    2009/07/26 20:00
    • Aikidokr

      Check below;

      TEL : (062)573-1703 / 011-601-1732

      Dojocho : KIM Yong-ho

      Webpage : http://cafe.daum.net/woonamdojang

      E-Mail : gumgil0@hanmail.net

      2009/07/26 20:02
  2. chongyee

    hi, thanks for the contact. However, I don't get any email reply from gumgil0@hanmail.net and because I'm not good in speaking korean, so didn't make a call to the dojo. Do you have a map or something? Do you know about their schedule, so that I could visit the dojo..

    Thank you.

    2009/07/30 12:48
    • Check the map and schedlue above.:)
      I just called the dojocho, he will wait for your-visit-someday.

      Semoga beruntung.

      2009/07/30 20:08
Tips & etc.2009/07/12 02:26
http://shihan.exblog.jp/11464067/

  海外指導に行くと講習会の合間に会員の家庭に招かれる事があります。人によっては、世界中の師範のDVDやビデオを沢山持っていて見せてくれます。以前見 せてもらったビデオで、アメリカ人の指導者が「袴」の事を「サムライ パンツ」「サムライ パンツ」と連呼していました。ビデオの内容は忘れましたが「サ ムライ パンツ」という言葉に妙に感心したことを覚えています。
  해외지도를 가면 강습회 막간에 회원의 가정에 초대받는 일이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각국 사범들의 DVD나 비디오를 많이 갖고 있어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전에 보게된 비디오인데, 미국인 지도자가 '하카마'를 '사무라이 팬츠''사무라이 팬츠'라고 계속 불렀습니다. 비디오의 내용은 잊었습니다만, '사무라이 팬츠'라는 말은 묘하게 맘에 들었던 걸 기억합니다.

 昭和30年(1955年)頃は、本部道場の稽古でも15名来ると二代道 主植芝吉祥丸先生が今日は稽古人が多いといっていた時代です。昇段・昇級審査など無く1月15日の鏡開きの日に、昇段者名が発表されるだけでした。私も入 門して二年目ぐらいで初段を印可され袴を買いました。剣道の袴です。当時稽古する人が少ない合気道専用の袴などありませんでした。背中の腰板は中がボール 紙や布、またはゴムだったりして、メーカーによってまちまちでした。腰板の所に瓢箪形の帯に固定する物が付いていた事を記憶しています。
 剣道の 袴は合気道の動きや捌きに対応していません。稽古をしていると膝が直ぐ破れたり、脇のまちが直ぐにほころびます。剣道では袴を腰に強く固定する必要が有り ません。前後のひもも短く結び目が後に来ます。合気道では投げ、抑え、それ以上に座技がありますので、ずれないように腰にしっかり固定する必要がありま す。特に紐の結び目が背中にあると、何回も受け身を取ると打ち身になり炎症を起こしてします。合気道の稽古では剣道の袴だと色々不具合が出て、我々合気道 の内弟子達は不満を持ちました。
 1955년 경은, 본부도장의 수련에 15명이 나오면 2대도주 우에시바 기쇼마루 선생이 '오늘은 수련생이 많군'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승단`승급심사 따위는 없었고 1월15일의 카가키비라기(鏡開き,신년 첫수련)에 승단자 이름이 발표될 뿐이었습니다. 저도 입문하고 2년째 정도에 초단을 받고 하카마를 샀습니다. 검도 하카마입니다. 당시 수련하는 인구가 적은 아이키도 전용의 하카마 따위는 없었습니다. 등의 요판은 속이 골판지나 천, 또는 고무 등으로, 메이커 별로 제각각 이었습니다. 요판 자리에 주걱모양의 허리띠에 고정시키는 물건이 붙어있던 것도 기억합니다.
 검도 하카마는 아이키도의 움직임이나 몸놀림에는 맞지 않습니다. 수련하고 있으면 무릎이 바로 찢어지거나, 옆구리쪽이 바로 튿어집니다. 검도에서는 하카마를 허리에 강하게 고정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앞뒤 끈도 짧고 매듭이 뒤에 옵니다. 아이키도에서는 던지기, 누르기, 거기다가 좌기가 있으므로, 흐트러지지 않게 허리에 확실히 고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끈의 매듭이 등에 있으면, 몇 번이고 수신을 하면 타박상이 생겨 염좌가 일어납니다. 아이키도의 수련에서는 검도의 하카마로는 여러가지 불편한 점이 많아, 우리 아이키도 내제자들은 불만이었습니다.

 当時から本部道場の道着や袴を一手に扱っていた新大久保にある岩田屋の女将さんと相談しながら、袴のひ もは前が・・cm、後は・・cm 紐の幅は・・cmそして紐にねじれが出ないように縫い目を何本いれてくれなど試作品をつくってもらい改良していきまし た。当時はレイヨン、テトロンなどは夢の繊維で、値段が高くて現在の様に袴などの布にはされません。みんな木綿です。ごわごわしていて洗いでもしたら折り 目を付けるのがたいへんでした。特に紺の袴は藍染めですので汗でもかけば手や稽古衣まで青く染まりました。 その内にテトロン入りの混紡の袴が出てきて、 たたむのや洗濯が楽になりました。しかし値段は2倍か3倍位していました。
 당시부터 본부도장의 도복이나 하카마를 일절 챙겨주면 신오쿠보에 있는 이와타 가게의 여주인님과 상담하면서, 하카마의 앞의 것이 몇 cm, 뒤의 것이 몇 cm, 끈의 폭은 ..cm 그리고 끈이 뒤틀리지 않게 솔기를 몇 개 넣어달라 등 시제품을 만들도록 부탁해서 개량해 갔습니다. 당시에는 레이온, 테트론 등은 꿈의 섬유로, 가격이 비싸 현재와 같이 하카마 따위의 천이 아니었습니다. 모두 목면입니다. 빳빳해서 빨기라도 하면 주름을 잡는 것이 큰~일이었습니다. 특히 청색 하카마는 남염(藍染)이라서 땀이라도 나면 손이나 도복까지 파랗게 물들었습니다. 그러면서 테트론이 들어간 혼방 하카마가 나와서, 개거나 세탁하는 게 편해졌습니다. 하지만 가격은 2배인가 3배 정도였습니다.

 かなり前の話ですが、明大体育会合気道部員の2年生までの男 子白帯部員に、何分で袴を付けられるか計った事がありました。女子部部員は入部と同時に袴を着けますので問題はありません。しかし男子部員は入部当初から 先輩の袴をたたむ事は「イヤッて言うほど」指導をうけます。しかし初段になるまで袴は着けません。突然着けてみろと言われ、また時計で時間を計られたので パニックになったのでしょう。片方の裾に両足を入れたり、袴の紐の結び方など全然分からずオロオロするばかりです。15名以上いた男子部員で正確に着けた 人は一人もいなくて驚いた事がありました。その事があって以来、合気道小林道場では袴に慣れさせるために、茶帯になると先輩や先生の袴を稽古終了後にたた む様に指導し、初段受験前に袴のはき方を先輩から教わるようにしています。
 꽤 예전의 일입니다만, 메이지대 체육회 아이키도부원의 2학년까지의 남자 흰띠 부원에게, 몇 분 만에 하카마를 입을 수 있는지 재어본 일이 있습니다. 여자부원은 입부하는 동시에 하카마를 입으니까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남자부원은 입부 당초부터 선배의 하카마를 개는 일은 '지겹다'고 할 정도로 지도를 받습니다. 하지만 초단이 될 때까지 하카마는 입지 못합니다. 갑작스럽게 입어보라는 말에, 또 시계로 시간을 잰다고 하니, 패닉을 일으킨 것이겠죠. 한쪽 구멍에 두 발을 다 넣는다거나, 하카마 끈을 묶는 법 따위 전혀 몰라 허둥지둥 할 따름입니다. 15명 이상의 남자부원 중에 정확하게 입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기막힌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아이키도 고바야시 도장에서는 하카마에 익숙해지도록 하기 위해, 밤띠가 되면 선배나 선생의 하카마를 수련 종료 후에 개도록 지도하고, 초단 수험전에 하카마를 입는 법을 선배로부터 배우도록 하고 있습니다.

袴の付け方、たたみ方は色々なかたちがあります。どれが正しい か私にはよく分かりません。袴をはくときにずれたり、乱れたりしなければそれで良しとしています。たたむ時はかたちや折り目がビシットとしていて見た目が 綺麗でカバンなど持ち運びに適応しれば良いと私は思います。
袴もこまめに洗濯して下さい。袴を着けて以来洗濯したことが無いなど自慢しないで下さい。・・・清潔が大切です。
 하카마를 입는 법, 개는 법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어느 것이 올바른 것인지 저는 잘 모릅니다. 하카마를 입을 때 어긋나거나, 흐트러지거나 하지만 않으면 그걸로 됐다고 봅니다. 갤 때는 모양이나 주름이 쫙 하고 잡혀있어 보기 좋고 가방에 넣고 다니기 적당하면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카마도 바지런히 세탁해 주십시오. 하카마를 입은 이후 세탁한 적은 한 번도 없다며 자랑하지 말아주십시오. ...청결이 제일입니다.



















(참고로, 아래는 Xebec에서 말하는 도복`하카마의 선택법)

道衣・袴の選び方

合気道の稽古において、決まった道衣という物はありません。柔道衣・剣道衣・空手衣等、どれを着用しても
 構いません。袴についても、特に合気道袴でなくとも、剣道用の物でも差し支えありません。
 昔(私が合気道を始めたころ:20数年前)は、合気道用の道衣・袴はなく、柔道衣・剣道袴を着用していました。
 武道具メーカーが、より合気道に適した物をと言うことで色々と改良を重ね、現在の合気道衣・袴ができています。
 合気道衣については柔道衣の様に袖・丈のの長さ等の規定がありませんので胸紐を付けたり、袖を短めにしたり
 座り技用にズボンのすねの部分を厚めにしたりしています。
 袴については、剣道袴より紐を長くし前結びができる様にしたり、受身の時の怪我を防ぐ目的で、腰板をゴムにした
 りしています。そういう意味では、柔道衣と合気道衣、剣道袴と合気道袴とに大きな差はなく、合気会公認のマーク
 がついている物が合気道用品と言っても過言ではないと思います。

<도복, 하카마의 선택 방법>

아이키도의 수련에 있어, 정해져 있는 도복이란 없습니다. 유도복, 검도복, 공수도복, 어느 것을 착용해도 관계 없습니다. 하카마에 대해서도 특별히 아이키도용 하카마, 검도용 하카마라든지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예전(원문의 필자가 아이키도를 시작한 20여년 전)에는, 아이키도용의 도복, 하카마는 없고, 유도복과 검도용 하카마를 착용했습니다. 무도용품 메이커에서, 보다 아이키도에 적합하도록 개량을 거듭하여, 현재의 아이키도 도복, 하카마가 만들어졌습니다.

아이키도 도복에는 유도처럼 소매, 몸통 기장의 규정이 없으므로, 가슴팍에 끈을 단다든지 소매를 좀 짧게 만든다든지, 좌기에 적합하도록 무릎부분을 두껍게 한다든지 하고 있습니다.

하카마에 대해서는, 끈을 좀 더 길게 하여 앞에서 매듭을 지을 수 있도록 한다든지, 수신을 할 때 부상방지를 위해 허리받침을 고무재질로 한다든지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유도복과 아이키도복, 검도 하카마와 아이키도 하카마는 큰 차이가 없고, 아이키카이 공인마크가 붙어있는 게 아이키도용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본인은 근래에는 하의는 호랑이표 선수용 유도복 바지, 상의는 중국산 이중직 여름용 검도복 상의, 하카마는 Xebec의 경량하카마(100% 폴리에스테르, 청색)를 입고 있음. 세미나에서 보자면 슬슬 다수의 유도복 상의파에 소수의 검도복 상의파로 양분되어 가는 듯함.

↑ 새벽 2시 반에 공부하다가 머리식히려고 고바야시 선생 블로그 들어갔다가 필 받아서 번역해서 올림. 아직 공부할 거 마이 남았는데..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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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벡 하카마 2번째 구매(A newly bought Xebec S-970 hakama)  삭제

    2010/02/26 13:01TRACKBACK FROM AikidoKR.NET since 1997

    3년 전에 구매했던 하카마가 장렬히 전사했습니다. 지벡에서 판매하는 경량하카마(남색). 큐빅센서 처리되어 가볍고, 주름도 잘 지워지지 않고, 빨리 마르는 등 장점이 아주 많은 제품이었지만, 폴리에스테르 100%라는 태생적 한계는 극복할 수 없었습니다. 네, 저 아무 생각 없이 뜨끈뜨끈한 히터 바로 앞에 서있었습니다.(눈물) My Xebec hakama, which I've used for 3 years, faced glorious death.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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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s(동영상)2009/03/19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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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anks

    2009/03/22 05:03
  2. 수십번을 보아도 역시 최고......... 야마시마 센세. 그 자유와 그 단순함.

    2009/06/10 02:24